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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3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문제를 국제문제로 부각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 부 위원장을 맡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고, 같은 해 10월 이관용마 저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스위스로 향하자, 파리위원부의 실질적 책임 자로 활동하였다. 황기환은 인력 의 부재와 재정의 곤란을 겪었지 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프랑스 · 미 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의 한국 침략과 통치의 실상을 널리 알렸다.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부각시키는데도 노력하였다. 1919년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보고하였고, 1920년 1월에는 국제평 화촉진회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회복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한국인 노동자와 유학생 지원에도 앞장 섰다. 1919년 10월~11월,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러 시아 무르만스크의 한국인 노동자 500여명을 돕 기 위해 프랑스 · 영국 정부와 교섭을 벌여 그 중 일 부가 프랑스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는 프랑스로 오는 한국 인 유학생들에게 학교와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역 할도 수행하였다. 1920년 1월 8일 프랑스 인권옹호회와 협의하여 ‘한국문제 대연설회’ 개최를 이끌어냈다. 파리지리 연구회 대회장에서 열린 이 연설회에는 정치가 · 언 론인 등 각계인사 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 루었다. 같은 해 4월 23일에는 이탈리아 산레모에 서 열린 평화회의 최고회의에 이미 제출한 「한국독 립안 토론 요구」를 갱신하는 취지의 전보를 보내기 도 하였다. 1920년 5월,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파리위원부 직원들. 둘째 줄 맨 오른쪽이 황기환이다. 파리위원부에서 간행한 『자유한국』 제2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