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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독립운동 크게 밝혀지지 않은 광주 최초 여의사 “현덕신” 73 1일 충청남도 공주군 영명학교에서 만 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고초 를 겪은 독립운동가이며, 평양 남산교회 와 평양 유정교회 목사로 재임했다. 현덕 신 지사는 이러한 오라버니를 통해 일찌 감치 개화사상과 독립의식이 싹튼 것으 로 보인다. 1911년 4월, 15살의 나이로 이화학당에 입학한 현덕신 지사는 1915 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제8회로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사립 진명여학교에서 학생 들을 가르치다가 로제타 홀의 추천으로 1916년 10월, 20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1917년 동경여의전 입학시험에 당당 히 합격했던 것이다. “내가 의사가 되려는 동기만은 퍽으나 순결하였 었으니 어떻게 하면 조선여자들을 위하여 도움이 될 까? 조선 사회에 유익한 인물이 될까하고 생각하다 가 교육계로 가는 것보다도 병이 들어서 죽을지언정 남자에게 뵈이지 아니하려고 하는 조선여자들을 위 하야 봉사적 생활을 하는 것이 거룩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 「女醫師가 되기까지의 苦心記」, 『신가 정』 제3권 11호(1935.11.1) - 현덕신 지사는 ‘조선여자들을 위해 의학의 길’을 선택했다고 했다. 국내도 아니고 당시 제국주의 일 본에서 일본말로 의학공부를 한다는 것은 말같이 쉬 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현덕신 지사는 의학공 부에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동경 여자유학생친목회(이하 여자친목회)에 들어간 것이 었다. 친목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해서 ‘단순한 친 목 단체’로 보면 안된다. 당시에는 대놓고 **독립단 체라는 이름을 쓰기 어려운 시대였다. 여자친목회는 1915년 4월 조직된 단체로 1920년 4월부터는 동경 여자유학생학흥회(조선여자유학생학흥회)로 발전하 여 1927년까지 활동했던 단체다. 이 단체에서 현덕 신 지사는 1916년 도일(渡日) 이후 1922년 귀국 전 까지 간부로서 여성 계몽운동과 2·8독립선언 및 독 립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간부로 2·8독립선언 참여 1917년 10월 17일, 여자친목회는 임시총회를 열 고 회장에 김마리아, 총무 나혜석, 서기 정자영, 부서 기 김충의를 선출했는데, 이때 현덕신 지사는 회계 에 선출되었다. 이들은 잡지 『여자계(女子界)』를 발 간하여 여성이 주체적 의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19년 2월 8일에는 유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에 참가하여 조국 독립 현덕신(오른쪽)·최원순의 결혼 사진 머리 빗을 시간을 아끼고자 단발을 감행한 현덕신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