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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유동열 선생 73 사들과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군사부 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그 를 국무위원으로 선임하였다. 유동열은 이처럼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하 여 활동하였다. 그 계기는 중일전쟁이었다. 1937년 7월 중·일 간에 전면적인 전쟁이 발 발하자, 임시정부에서는 전시체제에 대한 대 비와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추진하고자 하였 다. 이를 위해 7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유동 열·이청천·이복원·현익철·김학규·안공근 등을 위원으로 선임하여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은 한국광복군 창설로 실현되었다.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하면서 임정은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였다. 군사특파단을 시 안(西安)에 파견하여 일본군 점령지역인 화북 지역의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 하기 시작하였고,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적 지 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 정부에 광 복군 창설에 대한 협조와 지원을 교섭하였 다. 이러한 준비작업을 거쳐 그해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하고, 대한민 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 하였다. 유동열은 한국광복군 창설 후 참모총장으 로 임시정부 통수부의 막료가 되었다.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은 일본육사 26기로 그의 후배 였다. 통수부는 임시정부 주석(김구)과 참모 총장(유동열)·군무부장(조성환)·내무부장(조 완구)으로 구성되었는데, 한국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하는 기구였다. 이로써 유동열 은 참모총장이자 통수부의 막료로서 임정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하였다. 통위부장으로 국군의 기틀을 마련 유동열은 일제가 패망한 후 임시정부 요인 들과 함께 1945년 11월 23일 환국하였다. 그 는 미군정이 통위부장을 제의하자 1946년 9 월 통위부장을 맡았다. 그는 통위부장으로 국 방군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는 독립국가로서 10만 명 가량의 국방군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의 조 직과 병력을 확대시켜 나갔고, 5만여 명의 병 력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 립되자 국방부 장관 이범석에게 군사권을 넘 겨 주었고,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각각 대한민국 육군과 해군이 되었다. 유동열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 고, 대한제국 군인·독립군·광복군을 거쳐 해 방 후 통위부장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기초를 마련하기까지 50여 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일평생을 군인으로 살아간 영원한 군인이었 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그는 그해 10 월 18일 평안북도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숨 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 대한민 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