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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 황진남 · 이의경(이미륵) · 김갑수 선생 73 상하이 임시정부 등지에 배포하였다. 재독 한인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일의지를 대외에 알렸다. 이때 유덕고려학우회의 황진남과 고일청은 10월 18 일 부르크하르트 박사를 찾아가 면담하며 진상을 파 악하였다. 10월 26일에는 재독한인들에 의해 ‘독일에 있는 한인들의 위대한 회의(Great Meeting of Koreans in Germany)’라는 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 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당한 한인들 의 억울한 죽음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규탄하 였다. 유덕고려학우회는 「한국에서 일본의 유혈통 치(Japanische Blutherrschaftin Korea)」라는 독문 전단지 5천부와 「Japan`s Bloody Rule in Korea」라 는 영문 전단지 2천부를 작성하여 해외 한인사회와 각국 정부 및 기관에 배포하였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의 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고 황진 남·고일청·김준연의 서명이 적혀 있다. 황진남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하여 수리학(數理學)을 전공하였다. 파 리 유학시절 그는 ‘시몬 흥’이라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러 나 2차 대전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부인과 함께 1938년 9월 귀국하 여 고향인 함흥에서 살았다. 1944 년에는 신설된 함흥의학전문학교 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되자 황진남은 서울로 이주하여 여운 형이 이끄는 건국동맹에 가입하고 비서로서 보좌하 였다. 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서 외무국방위 원장에 선출되었으나, 1948년 3월 18일 입법의원직 을 사임 후 정치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황진남 은 이후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번역과 통역 일을 맡아 보았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 도쿄로 가서 일하다 1970년 5월 13 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9년 건국훈장 애 족장을 추서하였다. 독일에 남겨진 아름다운 한국의 기억 이의경 이의경(李儀景, 1899~1950)은 이미륵(李彌勒, Mirok Li)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재독 작가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1남 3녀 가운데 1남으로 출생했다. 이의경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옛 풍습에 따 부르크하르트 박사를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반영하여 한인 희생자를 총계 2만 1,600여 명으로 보도한 『독립신문』 168호 2면 기사(1923.12.26자). 「적에게 학살 된 동포 橫濱[요코하마]에만 1만 5천 총계 2만 1천 6백여명」으로 보도하고 있다(이 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