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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월의 독립운동가 • 프레드릭 에이 맥켄지 ·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 루이 마랭 선생 73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3 · 1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많은 미국인들은 소위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며 일 본 비판을 주저했다. 이때 톰킨스는 일본의 비인도 적인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 립을 지지하는 대중 집회를 주도했다. 특히 그는 한 국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거중 조정을 각계 인사 에 호소하고 요청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군축회의 개막을 앞두고, 톰 킨스는 미국 한국친우회 25,000여 명의 회원을 대표 하며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청원 서를 보냈다. 청원서에는 “일본에 의한 한국 침탈과 한국민의 열망과 배치되는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는 국제적 원성과 비판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결국 세 계 여타 국가와 관련된 극동 평화에 혼란을 가중시 킬 수 있다”는 경고와 ‘합리적인 수준의 정의를 한국 이 쟁취할 수 있도록 미국이 거중 조정할 것’을 요청 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인에 대한 지지와 애정은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도 발휘되었다. 지진 후 한국인에 대한 학살 소식을 접한 톰킨스는 11월 20일 일본의 학살과 탄압을 비판하는 항의서를 제출 했다. 1932년 남다른 도덕성과 정의감으로 존경받던 톰 킨스가 숨을 거두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 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영국에서 정의로운 한국인의 투쟁을 옹호한 프레드릭 맥켄지 1869년에 캐나다 퀘벡주 리치몬드에서 태어난 프 레드릭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는 1881 년 영국으로 건너가서 20대 중반부터 영국 런던에 서 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폴몰가제트(Pall Mall Gazette)’사를 거쳐 ‘데일리 메일(Daily Mail)’사로 자리를 옮긴 후 동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며 종군기자 가 되었다. 1904년 만주(중국 동북지방)와 한국 등지 에서 러일전쟁을 취재한 맥켄지는 일본군의 지휘체 계 등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맥켄지는 러 The Tragedy of Korea(1908), Korea’s Fight for Freedom(1920)의 겉표지(책등 포함)와 속표지(지평의병 · 지평리전투기념관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