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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댕기머리 열네 살 소녀가 외친 목포의 함성 “김나열” 73 ① 어머님이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지 않은 까닭은? 어머님은 늘 당시의 기미년 3 · 1 만세운동 때의 공 적을 신청하시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길 나 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세운동에 주동자로서 참석하지 않을 조선 사람 이 어디 있었겠느냐고 하셨다. 누구나 해야만 할 일을 당연히 했는데 무슨 큰일을 했다고 보상을 받겠냐하시면서 겸양의 덕을 보이셨다. (김나열 지사의 포상은 2012년에 이뤄짐, 대통령표창) ② 대구 형무소에서의 가장 가슴 아팠던 어머님의 기억 당시 함께 수감 됐던 어머님이 언니로 모시는 천 규녀(천귀례[千貴禮]의 오기인 듯-필자) 여사에 대 한 쓰라린 기억이다. 대구 형무소에서 얼마나 갈증 이 났던지 천규녀 여사 앞으로 따라준 물컵의 물마 저도 어머님이 재빨리 마셨다. 그러자 천규녀 여사 가 펑펑 우시면서 네가 얼마나 갈증이 났으면 내 물마저도 마셨느냐 하시면서 도리어 어머님을 위 로하셨던 그 장면은 어머님이 일생을 두고 잊지 못 할 쓰라린 기억이라고 늘 자식들에게 말씀하셨다. ③ 일생을 요통(腰痛)으로 고생하셨다 목포정명여학교의 3 · 1만세운동 주동자로 왜경에 게 체포당할 당시 왜경이 어머님의 머리채를 낚아 채고 구둣발로 허리를 찬 것이 원인이 되어 어머 님은 일생을 요통으로 고생하셨다. 어머님이 체포 당할 당시의 나이 불과 14살의 어린 소녀였다. ④ 해방 직후 어머님의 활동 전라남도 애국부인회 회장, 광주 YWCA 회장 등 을 역임하시면서 많은 군중집회에서 연설을 하실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자신이 3 · 1만세운동 당 시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당하셨다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면서, 우리 정부가 무능했고 국민이 일본 국민보다 개화하지 못해서 일제에 합 병을 당하는 치욕을 당했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목포만세사건’을 크게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