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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이후 일본군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 건너편의 두만강변으로 퇴각하였다가 철수명령을 받고 황급히 본대로 돌아갔다. 이로써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 참담 한 패배를 경험한 채 두만강을 건너야 했다.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초전이나 다름없었다. 봉오동 전투 이틀 후인 6월 9 일 에 비파동 으로 넘어온 일본군과 전투가 있었다. 홍범도의 <일지>와 연변지방 노인들의 증언에 등장 하 는 '비파동 전투'도 봉오동 전투의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 ▶ 봉오동 전투의 역사적 의미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로 연합 한 독립군 부대가 거둔 최초의 ‘대첩’이었 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뿐만 아 니라 모든 독립운동계와 동포들의 사기 를 매우 높여주었던 쾌거였다. 이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 몇명 사살했다는 단순한 전투성과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독립군 각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간도에 침입한 대규모의 일본군을 상대 로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 에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독립군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져 항일무장투쟁이 더 욱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 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함경도 온성 비파동 일대 봉오동 전투 유적지를 가다. 중국 동북지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延吉)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문시(圖們市)로 가는 버스를 타 고 40여분 거리에 있다. 그동안 봉오동 전투 유적지를 여러 번 답사하였기에 차창으로 스쳐가는 모든 풍 경들이 낯설지가 않다. 연길에서 훈춘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도문시, 훈춘시, 왕청현 등지를 오가며 북간도 일대 독 립전쟁 유적지를 답사했었다. 차창을 스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 위로 봉오동 전투 유적지를 답사했던 기억들이 서서히 오버랩 되어 온다. 특히 2020년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에 만주지 역 항일유적을 오랫동안 답사한 사람으로서 특별한 감회가 있으나 아쉬움 또한 적지 않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시에서 도문시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40여 킬로미터 달려서 도문터미널에 도 착했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봉오동으로 향했다. 도문시에서 봉오동 전투 유적지 입구까지는 약 10 킬로미터의 거리로 안산촌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왕청현 가는 길로 10여분 달려가면 수남촌에 도착한 다. 그곳에서 마을 안으로 우회전하여 1.5킬로미터 들어가 토성촌을 지나면 봉오동 전투 유적지의 입구에 도 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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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일대 6일간의 독립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