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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 김창환 · 이진산 · 윤덕보 · 김원식 선생 73 1923년 1월 임시정부의 향후 방향을 논의하는 국 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되자, 그는 개조파의 일 원으로 국민대표회의 특별심사위원ㆍ의정기초위원 (議程起草委員)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6월 창조파가 새로운 정부 조직을 발표하자, 그는 한족회 대표 명 의로 임시정부의 개선을 통한 정부유지에 힘써야 한 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를 위해 개조파 56명과 함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4년 7월 이광민 등 10여 명과 함께 전만통일 발기문(全滿統一發起文)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서명 했다. 또한 서로군정서 대표로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1925년 3월 중앙행정부 법무 부위원장, 8월에는 재무위원으로 정의부의 핵심요 직을 맡으며, 통합단체인 정의부에서도 중추적인 역 할을 담당했다. 한편 1926년 12월 길림성 반석(磐石)에서 정의 부 · 한족노동당, 남만청년총동맹 등이 발기한 조선혁 명자후원회(일명 모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정 부는 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 윤덕보와 정의부 1919년 3월 윤덕보(尹德甫)는 함경남도 홍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 한독립군비단(軍備團)에 가입하였다. 군비단은 1919 년 5월 함경남도 혜산진 대안 장백현(長白縣)에서 함 경남도 출신의 이희삼(李熙三) 등이 중심이 되어 조 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그는 군비단에서 재무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21 년 6월 장백현 16도구(道溝) 신창동(新昌洞)에 위치 한 본부총단의 산하기관인 통신사무국에서 국장 대 리로 활동했다. 또 같은 해 11월부터는 총단장으 로 서 총무장 한기호(韓基鎬), 비서부장 한동초(韓東礎) 등과 함께 일했다. 한편 군비단이 1921년 10월 흥업단(興業團) 등 주 변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을 조직 했을 때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후 각 단체들의 발기 로 독립운동세력을 후원하는 농민회를 조직할 때 주 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군비단 · 흥업단 · 태극단 등이 대한광정단 (大韓匡正團)을 조직했을 때는 총무장으로 단체의 활 동을 지원했으며, 조직이 확대 개편된 1923년에 대 한광정단의 단장이 되었다. 1924년 대한통의부·서로군정서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된 정의 부에서는 통합을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행정위원으 로 선출되었다. 통합단체 정의부에서 중심적인 역할 을 맡았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25년 7월 임시 의정원에서 개정한 헌법에 따라 국무령제를 신설했 다. 그런데 정의부 지도자인 이상룡을 임시정부 국 무령(國務領)으로 임명하게 되면서 정의부 내부에서 는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상룡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이 해 10월에 내각을 조 직했는데, 이때 윤덕보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의 독 립운동을 막을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중국 봉천성 경무국 사이에 맺어진 삼시협정(三矢協定)과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이 임시정부를 만주 독립 운동 단체의 상위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 상황 등으로 임시정부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