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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김좌진 장군과 함께 뛴 만주의 여걸 “오항선” 73 이는 권혁우 지회장과 함께 만난 부 인 이용순(68세) 씨의 이야기다. 사이 좋은 고부간의 지난 시간을 엿볼 수 있 는 순간이었다. 오항선 지사 부모의 고 향은 황해도 신천으로 부모님은 일찍이 만주로 진출하여 오항선 지사는 1910 년 10월 만주 길림성(吉林省) 석두하자 (石頭河子)에서 태어났다. 독립군을 돕 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지 만 조국을 일제에 빼앗기고 ‘망국노(亡 國奴)’로 이국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 실에 일찍 눈을 떴다. 그러나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시던 아버지가 조선을 침탈한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오해산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했다. 일찍부터 철이 들었던 오항선 지사는 18살 때부 터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좌진 장군 의 부하가 되어 무기 운반과 은닉 및 연락책임을 도 맡아 목숨을 건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오항선 지사는 1929년 1월 신민부(新民府) 소속 독립운동 가 40여 명이 길림성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하 얼빈에 있는 일본 영사관원과 중국군의 습격을 받 아 유정근 등 12명이 체포되자 숨겨둔 무기를 안전 한 곳으로 운반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0년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부인 나혜국 과 함께 부하 동지들의 생활을 지원했으며, 그해 1 월에는 암살당한 김좌진 장군의 복수를 모의한 고 강산, 김수산 등 6명에게 권총을 전달했다. 무기를 전달하는 과정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천만 한 일이지만, 오항선 지사는 두려움 없이 무기 운반 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오항선 지사는 1930년 10 월 독립군 활동을 돕던 중, 자신의 집에서 남편 유 창덕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한편 길림(吉林) 감옥에서 옥고를 겪던 남편은 1931년 9 월 18일 일본군의 만주침략 사태인 9·18사변(일명 만주사변)으로 시국이 어지럽게 된 틈을 타 탈옥했 으나, 공산당원의 저격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홀로되어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오항선 지사는 1935년 안중근의 누이동생인 안성녀의 아들 권헌 선생과 재혼하여 함께 독립운동에 힘썼다. 권헌 선 생은 당시 중국에서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조국독립의 물 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광복을 맞아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을 때는 빈털터리 였다. 중국 내에서 기반을 잡아 활동하던 모든 것들 을 중국 땅에 두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 었다. 방 한칸도 없이 시작한 부산 생활은 꿈에 그 리던 조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항선 지사는 시어 오항선 지사의 시어머니는 안중근 의사 여동생 안성녀 씨로 사진은 안중근 의사 아들 준생 씨의 장례식 모습. 동그라미 표시가 안성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