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page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혼숫감 옥양목으로 태극기 만들어 시위에 앞장선 “김반수” 73 만 15세의 어린 소녀 김반수의 감옥생활은 끔찍 한 것이었다. ‘형무소 인권’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았 던 일제침략기 형무소 상황이란 김반수 지사의 말 을 빌리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윤희 (1880~1961) 지사의 경우는 옷을 홀라당 발가벗 겼다고 하니 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 다. 1919년 3월 11일,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면 김반수 지사는 1919년 3월 말 부산진일신여학 교 7회 졸업생으로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 이다. 그러나 만세 가담자로 잡혀들어가 1920년 봄에 가서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기 념관에는 이 학교 출신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당시 사진과 활동 상황 등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댕기머리를 한 가녀린 여학생이지만, 조국 독립에 한목숨을 내놓겠다는 결의로 만세운동에 당차게 참여했던 김반수 지사의 학창시절은 그렇게 기념 관 건물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1925년 동래구 복천동 500 번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한 뒤 ‘동래일신여학 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1940년 3월 일제의 종교 탄압정책으로 동래일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 자 민족혼을 기리는 애국 유지들이 학교 폐쇄를 안 타깝게 여기고 재단법인 구산학원(현, 학교법인 동 래학원)을 세워 ‘동래고등여학교’라는 이름으로 5 월 30일 개교식을 가졌다. 김반수 지사가 다니던 좌천동 부산진일신학교는 지금은 기념관으로 바뀌 었지만, 그 뿌리는 부산 경남지역 3·1만세운동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깊게 느껴졌다.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혹여 교정 어딘가에 독립 의 함성을 부르짖던 여학생들의 발자취라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오래도록 교정을 서성였다. 기념관 국기 게양대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다보자니 서슬 퍼런 왜경의 총부리에도 두려워 않고 옥양목 옷감으로 만든 태극기를 손에 들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던 여학생들 모습이 그려진다. 아! 그날의 함성 이여.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 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 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이윤옥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 앞 ‘3·1운동 만세 시위지’ 표지판 앞에선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