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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국립서울현충원 ‘여성 길’ 탐방 73 입증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단지 우리 사회가 그 동안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는지를 반증하 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여성의 무덤이나 위 패를 찾아 나서는 국립서울현충원 ‘여성 길’을 종종 걷 고 있다. 이에 여성 독립운동가에 집중하여 탐방을 해 보았다. ‘신여성’의 선구자 김란사, 여성 해방의 새 장을 열다 현충탑 위패봉안관은 현충문을 통과하자마자 정면 으로 보이는 현충탑 안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서거 99주년에 즈음한 2018년 3월 9일에야 현충탑 위패봉안관에 봉안된 순국선열 김란사의 위패 를 만날 수 있다. 미국 웨슬리언 대학에 유학하여 1906년 한국 여 성 최초로 문학사 자격을 취득한 ‘신여성’ 김란사가 이화학당의 교수로 있던 1911년, 여성교육의 목적 과 관련하여 개화파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던 기독교 계 인사 윤치호와 논쟁한 사건은 여성해방 운동의 역 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윤치호가 『The Korea Mission Field(한국선교현장)』라는 영문선교잡지 에 「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직업훈련을 위한 간 청)」이라는 제목으로 학당에 다니는 신여성을 비판 하고 나서자 김란사가 윤치호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 판하는 내용을 담은 글 「A Protest」(항의)를 기고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논쟁은 지속되지 못했다. 신 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윤치호가 일제에 구속되 었기 때문이다. 1919년, 김란사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여성계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로 가던 중 그해 3월 10일 급작 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김란사의 죽음은 많은 이들 을 안타깝게 했다. ‘일제 밀정 배정자에 의한 독살설’ 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당시의 기록은 김란사의 사망이 병사였음을 밝히고 있었다. 드물게 발견되는 독립유공자묘역의 여성 독립운 동가들 2021년 3월 현재, 국가보훈처가 인정하는 독립유 공자 16,685명 중 여성 독립유공자는 526명(3.15%)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 안경신 · 유관순의 위패(이하 현장 사진은 김학규 촬영)김란사 사진(위패봉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