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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73 후 1922년 2월 2일 대회가 종료되자, 같은 해 3월 경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 뒤, 활동을 재개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國 民代表會籌備委員會)에 참여하였다. 국민대표회주 비위원회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모든 사항을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새롭게 이 위 원회를 구성했는데, 그는 12명의 위원 중 한명으 로 선출되었다. 서기에 임명되어 1922년 5월 10일, 남형우 · 김철 · 원세훈 · 서병호와 함께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을 통해 “과거의 모든 분규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국민대표회 소집 사항도 준비하고 책임을 부담하여 성립 되었음”을 밝혔다. 1923년 유학을 위해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대학 교에 재학하며 정경학(政經學)을 전공하였다. 1927 년 3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욕 · 샌프란시스 코를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한국 민주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후 제헌국 회 의원과 제4 · 5 · 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제6 대 보건사회부장관과 제6대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서울 명륜동에 거주하다가 1984년 7월 6일 서거하 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 였다. 유럽지역 외교운동의 개척자, 황기환 황기환(黃玘煥, 1886~ 1923)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영문 이 름은 Earl K. WHANG이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 가 공립협회(共立協會)에서 활동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 스코에서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족운동단체 이다. 1906년 6월까지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09년까지 지방회원으로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 원병으로 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소 대장으로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며 독일 베를린 에 입성한 부대를 이끌었다. 1918년 11월 종전 이 후 유럽에 남아 있다가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프랑 스 파리로 이동하였다.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후, 파리위원부 에 합류하여 서기장을 맡았다. 「통신전」을 발행하 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한국 『독립신문』 1921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민대표회의 촉진 제2회 연설회 관련 기사. 황기환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