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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024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7월의 독립운동가 시스코 중앙총회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했고,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개소한 한인학생양성소에 입소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소식 을 접한 황진남은 캘리포니아대학을 자퇴한 후 캘리 포니아주 각처에 다니며 독립운동을 위한 유세를 펼 쳤다. 1919년 3월 15일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 회 중앙총회에서는 전체대표회를 열고 안창호를 재 미한인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황진 남과 정인과를 통신원으로 임명하고 안창호를 수행 하여 상하이에 파견하였다. 1919년 5월 상하이에 도 착한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었고 황진남과 정인과는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 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영문에 능숙하여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조선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자 선전문을 작성하였다. 다음해 3월 상하이 지역 신문에 3·1운동과 임 시정 부의 활동을 폄훼하는 기사가 나돌자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 영문판 3월 16일자에 조선 독립운동 의 정당성을 알리는 반박기사를 자신의 명의로 실었 다. 1920년 6월 미국의원단이 아시아 각국을 순방한 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황진남은 미국의원단을 상대 로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안창호를 수행하여 필리핀 으로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권이 마련되지 못하 여 안타깝게 회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8월 16일 여 운형과 함께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 의 조선지배 실상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헌 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8월 17~20일에는 스 몰, 캠프, 하디 하원의원 등을 만나 조선 독립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황진남은 9월 29일 임시정 부 외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17일 황진남은 임병직과 함께 프랑스 선박 아토란츠크호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 여 3월 28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그는 파리위원부를 방문한 후 5월 18일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 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에서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 다.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보시 쉐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년 10월 9일자 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관동대 지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바를 게재하였다. 이 기 사를 본 재독 한인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유덕고려 학우회에서는 10월 12일 「한인학살」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전단을 제작하여 유럽과 미주 관동대지진 때 한인을 학살하는 일본 자경단원(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