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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 • 국채보상운동 71 부족한 모금액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전국 적으로 고조되었던 5월까지 전국적으로 241,098원 이 모금되었고, 6월 중에는 31,590원에 불과하였다. 1907년 8월 22일 총합계는 272,689원이었다. 1907년 5월 말부터 모금된 보상금 관리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각처의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은 이미 모 금한 의연금조차 중앙의 수집소로 보내기를 주저하 면서 5월 말 이후의 모금은 거의 정체되어 있었다. 더욱이 일제의 방해 공작이 공공연히 펼쳐지는 가운 에 초기의 열기는 급격히 식어갔다. 1910년 경에는 일본에 대한 국채가 1,450만 원으로 불어났다. 국채 보상운동으로 모금된 의연금은 모두 일제에게 빼앗 기고 말았다. 한편 1908년 10월 1일 출연된 의연금을 조사하기 위한 국채보상금검사소가 설립되었고, 1909년 11 월 16일 국채보상금처리회가 경성상업회의소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1910년 4월 18일 국채보상금 처리회 국민대총회가 흥사단 내의 사무소에서 열렸 다. 이 총회에서 “국민의 대동한 의견이 토지를 매수 하여 그 수조(收租) 이익으로 교육비에 사용하기로 의결”하였다. 1910년 9월 중순 회장 유길준을 비롯한 위원 40여 명은 “일한병합의 금일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의 기본금”이란 전제 아래 국채보상처리회를 교 육기본금관리회로 개칭하였다. 우선 교육기본금관 리회는 1910년 10월 중에 각도에 전답을 매수하거 나 기호학회, 교남교육회 등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의연금을 모집하여 보관하고 있던 각처의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은 그 지역의 교육비로 활동하 거나 상환하였다. 경북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를 이 끌던 심산(心山) 김창숙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모 은 돈으로 청천서원에 사립 성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전기의병 때 김산의진에 참여했고, 후기의병 때 산 남의진에 참여한 후에 영일군 죽장면 두마리의 보현 산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양제안은 개별적으로 모 금한 의연금 수백 원을 보관하고 있다가 국채보상운 동이 좌절된 뒤 모두 되돌려 주었으며, 이 과정에서 의연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5. 국채보상운동의 의의 약 1년 6개월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일제의 탄압과 방해 공작에 직면하고 말았다. 한국 근대사회가 형성되는 20세기 초기에 변혁의 주체로 등장하는 민중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무너졌고, 결국 1910년 8월 소위 ‘경술 국치’라는 국권 피탈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산업 진흥운동과 신교육구국운동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국 권회복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었 다. 그뿐 아니라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한국 침략 에 대응하여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구국에 대한 의지를 국민적 열망으로 결집하여 민족 운동으로 승화시키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 운동이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승화된 대표적 사례이 며, 이는 국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로 작 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