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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유동열 선생 71 해지자 해외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 에 참석하여 학생운동을 격려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1909년 6월 부친의 묘소를 참배하고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였다. 만주, 러시아, 중국 대륙을 넘나들다 유동열은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上海)를 오가며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 고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러한 국제정 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그는 1915년 3월 상 해에서 신규식·박은식·이상설·성낙형 등과 신 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 동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서 특히 군사 관계의 주요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3·1운 동을 계기로 국내외 각지에서 수립된 대한민 국임시정부가 그를 참모총장으로 선임한 것 이다. 1919년 3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4월 23일 국내에서 수립 을 선포한 한성임시정부에서 모두 그를 참모 총장에 선임하였다. 1919년 9월 세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통합을 이루어 새로운 임시정부로 출범하였 다. 당시 대통령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그는 참모총장에 취임 하였다. 그러나 1년 반만에 임시정부 참모총 장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르쿠츠 크로 갔다. 유동열은 고려군정의회를 중심으로 독립 군 세력들을 통합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장 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 적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1922년 8월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와 대한독 립단이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했을 때, 군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만주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 김학규(오른쪽)·오광심(왼쪽) 부부 등과 기념촬 영한 유동열(앞줄,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달성한 임시의정원 제34회 임시의정원 일동의 기념 사진(1942.10 중경, 국가보훈부 제공). 앞줄 왼쪽부터 유동열 박찬익 조성환 홍진 김구 최동오 조완구 김원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