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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 황진남 · 이의경(이미륵) · 김갑수 선생 71 교편을 잡았다. 동흥중학교는 천도교계에서 1921 년에 세운 학교로 유교계에서 세운 대성학교와 함 께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1927년 김갑수 는 윤건중의 권유로 다시 국내에 들어와 임시정 부 자금 마련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1938년 8월 16일 향년 45세를 일기로 영면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 리에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평소 좌우명인 ‘勿以感 情使用 當以理性判斷(감정을 사용하지 말고 마땅 히 이성으로 판단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국제외교에 뛰어난 임시정부의 인재 황진남 황진남(黃鎭南, 1897~1970)은 함흥 출생으로 1905년 무렵 아버지 황명선을 따라 하와이로 이 주했다. 1910년 9월 한인학교 졸 업식 당시 황진남은 연단에 올라 ‘대한국의 청년’이라는 주제로, “국 가적·신앙적·윤리적으로 완전한 교 육을 받을 때에, 우리가 능히 우리 대한국의 바라고 바라는 독립을 지 금부터 10년 안에 건설할 줄 믿는 다”라고 연설하여 박수를 받았다. 이후 호놀룰루 마노아벨리에 있는 중앙태평양학교에 입학하여 1915 년 7월 졸업했다. 1916년 황진남 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캘리포 니아대학 광물학과에 입학했다. 1917년 3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 1919년 안창호와 함께 한 황진남(오른쪽,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오른쪽 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가 황진남(왼쪽  끝), 둘째줄 왼쪽부터 김구, 다섯째 줄 오른쪽 첫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독립기념 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