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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 김창환 · 이진산 · 윤덕보 · 김원식 선생 71 만 그 꿈이 깨지고 대한 통의부마저 분열하기에 이르자 만주지역만이라 도 단체의 재통합을 이 루고자 하였다. 이에 김 창환은 대한통의부 대 표로 참석하여 국내외 각지에서 참석한 동지 들과 민족 주권확립, 독 립운동 노선 통일 등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 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25년 통의부와 길 림민회(吉林民會)를 토 대로 재편된 정의부가 조직되었을 때 재무위 원을 맡았는데, 당시 정 의부는 10개 단체의 대 표가 모여 재만한인단 체의 통합을 결의했던 단체이다. 그는 정의부 재무를 담당하여 재정 운용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총괄했다. 1929년 북만주로 이동한 그는 홍진(洪震) 등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 유력자들과 함께 생육사(生育社) 를 조직했다. 생육사는 만주 일대 가난했던 한인들 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마 련을 위해 설립한 단체였다. 그는 이를 모체로 1930 년 민본(民本)정치의 실현, 노본(勞本) 경제의 조직, 인본(人本) 문화의 건설을 강령으로 삼은 독립 운동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했다. 또한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일명 9 · 18사 변)’을 일으켰을 때, 한국독립군 부사령으로 총사령 이청천을 도와 일제와의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 렸다. 그러나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더이상 만 국민대표회의 개회 사실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3년 1월 10일자 기사 중국 요녕성 신빈현에 있던 정의부 청사(강용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