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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독립운동가 3대 지켜낸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김락” 71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兩家)의 한을 풀까 향산 고택 툇마루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말 걸어본다 머무는 하늘가 그 어디에 김락 지사 보거들랑 봉화 재산 바디실 어르신과 기쁜 해후 하시라고 해거름 바삐 가는 구름에게 말 걸어본다. - 필자의 시 ‘김락’- 양가 3대가 독립운동 투신 기미년(1919) 3 · 1만세운동 당시 김락(金洛, 1863.1.21~1929. 2.12) 지사는 쉰일곱의 나이로 안 동 예안장날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에 잡혀 고 문 끝에 두 눈을 잃고 말았다. 불행은 이어져 남편 이 중업은 1919년 11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한국 유림들의 독립의사를 적은 독립청원서를 중국에 전 하기 위해 출국을 앞두고 숨을 거두는 불운을 겪었 다. 이에 앞서 시아버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는 1895년 을미의병 때 예산의병장으로 활약한 분 으 로 1910년 8월, 국권침탈이 알려지자 24일간의 단 식으로 순절한 어른이시다. 그런가 하면 두 아들 이 종흠, 이동흠 역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잡혀가 고초를 겪는 등 김락 지사 집안의 독립운동사는 곧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댁 식구들만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친정 집안 역시 시댁 못지않은 독립운동가 명문 집 안이다. 1911년 1월, 전가족을 이끌고 서간도 유하 현(柳河縣)으로 망명한 친정 오라버니 김대락은 이 상룡·이동녕 · 이시영 등과 뜻을 같이하여 항일투쟁을 펼친 인물이다. 특히 초대 임시정부의 국무령(대통 령)을 지낸 이상룡은 김락 지사의 큰형부다. 오라버 니 김대락 선생은 만삭의 손자며느리까지 모두 데리 고 망명길에 올랐는데, 손자며느리가 망명길에서 산 기를 느끼자 일제가 짓밟은 땅에서 출산할 수 없다하 여 압록강을 넘어 출산하도록 했을 정도로 민족의식 이 투철한 분이었다. 이처럼 양가의 절절한 독립 투 쟁사를 몸소 겪어야했던 김락 지사는 본인 스스로 만 세시위에 참여하다 두 눈을 잃고 68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11년 동안 앞 못보는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백하구려’ 집 안내 표지판,이 고택은 김락 지사의 친정 오라버니 김대락 선생이 살던 집으로 백하구려(白下舊蘆)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백하(白下)’는 김대락 의 호다. 이 집은 선생이 1910년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떠날 때까 지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