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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71 협조를 이끌어냈다. 대한적십자회 회원 모집과 지 부 설립에도 적극 나서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부를  설립하고, 의연금 4,000여원을 모집하여 상하이 본 부로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8월 미국 상 ·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미의 원시찰단(美議員視察團)’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교 제위원에 선정되어 외교활동을 펼쳤다. 8월 5일 상 하이 아스타하우스 호텔에서 개최된 환영회에 참 석하여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 들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실상을 알렸다.  1921년 5월 러시아와 외교교섭을 위해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 안공근과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 되었다. 파견목적은 모스크바 자금 문제와 관련하 여 한형권의 활동 내역을 파악하고, 임시정부와 러 시아 정부 · 국제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 그 리고 이들로부터 자금지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22년 1월경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6개월여  간 러 시아 외무인민위원회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3년 1월경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다시 의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베를린대학 부속병원에 근무 하면서 호흡기 분야를 전공하였다. 그러면서 독일 에 체류하는 한인 유학생들의 실태와 관련 소식을  미국 한인사회에 알렸다.  이희경은 1924년 미국으로 돌아와 독일에 유학 하는 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뉴 욕지방 한인들과 함께 구제금을 모집하여 유학생 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1925년 4월에는  서재필(徐載弼) · 유일한(柳一韓) · 정한경(鄭翰景) 등 과 함께 유한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서기로 근무하며, 각종 사무 · 출장업무를 수행하는  등 회사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37년 중순 국내로 돌아와 호흡기 전문의로 활 동하였다. 서울 인사동에 병원을 개업하고, 언론에  위생과 관련된 글을 게재하는 등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1941년 6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2 · 8독립선언과 국민대표회 의의 든든한 조력자, 나용균 나용균(羅容均, 1895~  1984)은 1895년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운학동에서  태어났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 『동아일보』 1937년 7월 4일자에 게재된 이희경 귀국 관련 기사 나용균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