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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2025년 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월의 독립운동 4. 국채보상운동의 종식과 결과 일제의 방해 공작과 탄압 김광제와 서상돈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 보상연합회의소의 통합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전 국적인 단일화를 모색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을 조직 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에 따른 고종(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강 요, 그리고 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탈이 한층 강화되 었다. 그뿐 아니라 1907년 11월 국채보상연합회의 소 소장 김종환의 일진회 가입과 11월 국채보상기성 회 총무 오영근의 보상금 횡령사건 등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이 국채보상운동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한국통감부는 국채보상 운동을 ‘국권 회복을 꾀하는 배일운동’으로 인식하 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 총합소 회계를 맡은 대한 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을 1908년 7월 국채보상 금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또 통감부는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裵說)을 추방하기 위한 방해 공작 으로 국채보상금 소비사건을 조작했다. 양기탁은 다 섯 차례의 재판 결과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은 계속됐고, 이로 인해 국채보상 운동이 상당 부분 위축되었다. 1908년 7월 말 이후 대구금연상채회의 이현주 · 서 상돈 · 정재학 등은 이 운동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해 광고를 내고 전 국민이 대동단결할 것을 주장하였 다. 그러나 위축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열기를 되 돌릴 수는 없었다. 의연금과 처리 방안 일제의 방해 공작이 노골화되면서 더이상 국채보 상운동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국채보 상 의연금 총액에 대한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 의 「국채보상모집금의 건」( 『기밀서류철』, 정부기록 문서, 문서번호 88-1)에 의하면, 1907년 5월까지 모 집금의 총합은 241,908원, 같은 해 6월 중 모집금의 총합은 31,690원이며, 모두 272,689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될 당시 1,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것에 비교하면 턱없이 『황성신문』(1910.8. 21~9.8)에 실린 광고 「융희 4년 4월 18일 국채보상금처리회 국민대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