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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1월의 독립운동가 운반 중인 벼 수십 석을 빼앗아 소각하거나 은닉한 바 있으며, 전주(電柱) 등 일본의 통신시설을 파괴하 기도 했다. 1909년 9월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 시 작되기 전부터 김영백 의병부대에 대한 탄압이 계속 되었다. 국치원(鞠致元) · 유규상(柳奎相) · 김재섭(金在 燮) · 변반결(邊班潔) · 방순명(房順明) 등이 체포되었다. 약 두 달간 실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이후에도 김영백 의병장 휘하의 의병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일제의 변장대(變裝隊)에 의해 체포되 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백 의병장은 한동안 일제 군 경의 추적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제의 탐문이 갈수록 강화되자 1909년 11월 정읍 주둔 수 비보병대(혹은 고부헌병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 1심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후 1910년 5 월 3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 다. 독립의 도화선으로 목숨을 바친 한말의병 일제는 한말의병을 “한국의 독립을 안고(安固)하 게 만들려고 하는 망상”을 품은 세력으로 인식하였 다. 한말의병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일 제 군경과 무모한 투쟁을 전개하는 무모한 세력이라 는 평가이다. 일제 군경은 한말의병을 ‘폭도’라고 지 칭하며, 불법을 일삼는 강도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체포된 의병을 ‘내란과 폭동죄’보다 ‘강도와 살인 및 방화죄’로 재판에 회부하여 의병의 불법성 과 난폭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한말의병은 사생취의의 결사보국 정신으로 망국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국권을 1909년 일본군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의 모습(독립기념 관 제공). 윗줄 왼쪽부터 황두일 · 김원국 · 양진여 · 심남일 · 조규문 · 안계홍(안규홍) · 김병철 · 강사문 · 박사 화 · 나성화, 아래줄 왼쪽부터 송병운 · 오성술 · 이강산 · 모천년 · 강무경 · 이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