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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2024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7월의 독립운동가 공부를 이어갔다. 당시 변영로, 장면 등과 함께 공부 했다. 21세 되던 1915년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서 여운형, 서병호 등과 함께 수학 하였다. 이 때부터 김갑수는 조선인 유학생회를 이 끌며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1918년 그는 애국 동지 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제에 체포되 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다행히 수감 도중 탈출에 성 공하여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난 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 으로 활동했다. 이 때 독립운동가 김인전을 만났고 그의 여동생인 김정신과 결혼했다. 이 무렵 김갑수 는 의정원 의원이었던 전북 출신 윤건중(尹建重)과 함께 임시정부 발행 국채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1년 27세 되던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에서 파송하는 유학생 16명을 인솔하여 독일 유학길 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의 뷔이그즈대학에서 4년간 수학하며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대부분의 유학생들 이 인문학을 수학하는 것과는 달리 수학과 자연과학 을 공부했다. 독일생활 초창기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인 안봉근의 주선으로 한 수도원에서 수개월간 생 활하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1921년 베를 린에서 결성된 유럽 최초의 유학생단체 ‘유덕고려 학우회’의 첫 간사장을 맡았고 윤건중이 서무를 맡 았다. 1923년에는 이극로와 김준연 등이 뒤를 이어 받았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칸트슈트라세 (Kantstraße) 122번지였다. 132번지는 바로 안중근 의 사촌동생 안봉근의 집이었다. 학우회는 자신들의 기관지로 『회보(Heba)』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 을 알렸다.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으로 학업을 유지 하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지원 하며 대외선전활동을 펼쳤고 여러 국제대회에 참가 하여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갑수는 독일유학 생회 회장을 맡아 넓은 덕망으로 68명의 유학생을 이끌었다. 5년여의 유학생활을 마친 뒤 그는 1926 년 32세 때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교 교감으로 재직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북간도(현재 중국 연변)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중학교에서 김갑수가 1926~1927년 교사로 근무했던 용정 동흥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성주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