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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2024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주는 조선인민회 · 보민회(保民會) 등의 친일조직 및 밀정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부딪혀야만 하는 ‘적’이었다. 일제의 위협 · 압박 · 회유 등에 수세적으로 대응했던 장쭤린(張作霖) 군벌정권과 휘하 기관들의 부당한 요구 또는 간섭에도 독립운동가들은 적절히 대처해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암중모색의 고투를 거듭하면서도 독립운동 진영은 종종 적극적 응전과 준비된 행동 태세를 보여주곤 했다. 독립군조직들의 게릴라성 전 투 활동이나 단체원 혹은 개인이 감행하는 결사적 의열 활동이 그것이다. 전자는 주로 참의부 대원들 이 압록강 연변의 국경지대에서 감행하는 일본경찰 대 및 초소 기습으로, 후자는 불시에 벌어지는 일본 경찰 혹은 친일배 · 밀정 암살 · 처단 등의 사건으로 표 면화하였다. 이제 꼭 100주년이 되는 1924년 4월 김 만수 등 세 청년의 하얼빈 의거는 후자의 전형적 사 례라고 할 만하다. 1924년 3의사의 하얼빈 혈전 의거 ① 1924년 4월 초순의 하얼빈 총격사건 1924년 4월 6일, 하얼빈 외곽의 여관 동발잔(同發 棧)에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의 고등정탐부장 쿠니요 시 세이호(國吉精保)가 정복경관 3인을 대동하고 나 타났다. 그리고는 투숙 중인 청년 2명을 다짜고짜 붙 잡아갔다. 잡혀간 두 사람은 일찍부터 대한군정서 (별칭 ‘북로군정서’)의 재무부 모연국장(募捐局長)이 었으면서 특설기관인 청년모험대의 대장도 겸임했 던 이홍래(李鴻來)와 휘하 소대장 강승경(姜承慶; 이 명 강기무 · 강민선)이었다. 이홍래가 다른 4인의 청 년과 함께 얼마 전 하얼빈으로 들어와 은신, 활동 중 인 사실이 밀정 김모의 보고로 탐지되었던 것이다. 다른 청년 3인이 근처 부가전(傅家甸)에 따로 집 을 빌려 숨어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야마우치 시 로오(山內四郞) 총영사가 검거령을 내렸다. 이에 쿠 니요시가 휘하 경관 3인을 데리고 즉시 출동했다. 청 1920년대 하얼빈 부두가(埠頭街) 시가지 전경(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