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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의 횃불, 봉오동 전투┃67 삼둔자 전투에서 패전했다는 보고를 받은 함경도 나남 일본군 19사단 사령부는 야스카와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를 편성하 여 북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일본군과 독립군의 격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봉오동에서 재차 대규모의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일본군은 보병 37연대 제10중대 70명, 기관총 소대 27명, 보병 75연대 제2중대 123명, 헌병대 11명, 경찰대 11명, 기병대 등으로 대규모 혼성연합부대를 편성하 였다. 또한 월강추격대에는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한 아라요시 중대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대부대를 편성한 일본군은 야스 카와 소좌의 인솔하에 두만강변 의 온성군에 집결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신민단독립군 삼둔자 전투 유적지, 길림성 도문시 월청진 간평 삼둔자(새불이) 중국 도문시와 함경북도 온성(두만강 오른쪽)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일본군은 국경을 넘나들며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는 독립군의 본 부가 봉오동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뒤,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6 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과 해란 강의 합수목에서 두만강을 넘어온 후 골방령을 넘어 후안산으로 들 어와 전열을 가다듬었다. 일본군연합부대는 봉오골 일대 를 안내할 사람을 찾으려고 후안 산촌에 정찰병을 파견하였다. 그 때 두만강 건너 함경도 지방에 가 서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돌아온 최명국 등 13명의 모금대는 후안 산촌에서 다음 모금작전을 상의하 고 있었다. 일본군 정찰병들이 후안산촌을 살펴보다가 불이 켜져 있는 집으로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갑자기 침입한 일본군 정찰병을 향해 모 금대원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사살하고, 북쪽 고려령 기슭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불의에 기습을 받은 일본 군은 즉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밤이라 더 이상 피아간의 교전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두만강 후안산과 후안산촌 북간도는 독립운동가들의 세상, 후안산촌 전투 후안산촌 전투지(고려령 기슭의 후안산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