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page

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69 와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도 역시 대 표를 보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 동휘 등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을 대상으로 외교 활 동을 벌였고, 이승만 등 미주 한인들은 미국을 상대 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미국에 구 미 위원부를 두어 우리나라의 독립 문제를 국제적 으로 여론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군사 활동 역시 임시정부의 주요 활동이었는데, 상 하이에 육군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향후 광복을 위 한 독립 전쟁에서 활약할 지휘관을 길러내고자 노력 하였다. 또한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북간도 의 북로군정서와 서간도의 서로군정서를 직할 부대로 두고 서간도에 임시정부 직속 독립군 부대인 광 복군 사령부(광복군 총영)와 육군 주만 참의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군은 임시정부와는 별도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가 항전을 주도한 때는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부터였다. 민족 독립항쟁의 중추적 기 관이었던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하여 비밀 리에 국내 조직들과 연락을 취 해야만 하였다. 국내외를 연결 해준 비밀 행정 조직망의 역할 을 한 것은 연통제와 교통국이 었다. 연통제는 국내 각 도· 군·면에 설치된 지방 행정기관으로 정부의 문 서와 명령을 전달하고 군자금을 유통하며 정보 를 보고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통신기관인 교통국은 정보 수집, 분석, 교환 및 연락 업무를 맡았다. 임시정부는 원활한 활 동을 위하여 군자금이 필요하였는데 주로 애국 공채(채권)를 발행하거나 국민 의연금을 모아 충당하 였다. 국내에서 모아진 군자금은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하여 임시정부로 전달되었다. 만주의 이륭양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친 뒤 임정 구미 위원부 간부들이 찍은 기념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실린 의병전. 뒤바보가 지은 조선 말기 의병의 항일 투쟁기로 1920년 4월 27일부터 5월 27일까지 10회에 걸쳐 국한문혼용체로 연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서 효과적인 독립항쟁 을 수행하기 위해 발행 한 군자금 모집의 공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