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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2월28일 금요일 7 (제218호) 관향조 종친회 경남 밀양시 영남루 광장 의 밀성대군단이 세워(건수 建竪)진지 100년이 되었다. 이에전종원의관심과100주 년을 계기로 올해를 참배의 해로 정하여 선조의 얼을 받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대 군단 건립과정을 소개해 본 다. 밀성대군지단단소는1925 년 9월 2일 준공 이후 박씨종 약소 임원 87명 명의로 당시 전 종원에게 통고한 문서로 문서 일부와 밀성대군지단 비문(陰記 전문) 그리고 따 로 銘한 내용을 소개하기 전 본 자료는 밀양 출신 박순문 변호사가 소장하고 있는 선 조의 얼이 담긴 100년 전의 문서임을 밝히며 주요내용 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자 한 다. 통고문의 시작 글에서 뷺 생 각하건데관향(貫鄕)선조(先 祖)인밀성대군(密城大君)단 소(壇所)비석의음기는지난 을축년(乙丑年) 가을에 영남 루(嶺南樓)에 단소를 건립하 고고유할때팔역(八域)성손 (姓孫)의대종회 의결에 의하 여좌의기록과같이새겼다.다년간의분규가오늘 해소되었으며 모든 일의성취는 시기가 있는 것이 다.오늘해소가어찌천시(天時)에말미암아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단소를 통일하고 종인들이 단결 하는것은훌륭한일이며뷻 끝 부분에뷺당시도면대 로 사업을 계속 진행하며 표성기념비도 잇달아 새 길 것이니 우리 여러 종씨들은 더욱 정성을 다하여 천년이나 일루지 못한 선조의일을 준공하는데 힘 써주기를바라나이다뷻 라고 하고 있으며 음기와 더 불어 따로 명하기를 뷺나라는 비롯 옛 나라이나 그 터는 오직 새롭더라 수없이 많은 후손들이 모두가 전형을추모하니양양하게오르내리며임하는듯이 제사를드리도다아천만년동안제향을어기지마 소서뷻 라고 새겼다(학자에 따라서 역문이 다를 수 도있음을이해하기바람) 100년 전에 밀성대군의 단소건비를 위해 선조님 들의 발자취를 정리해 보면 1922년 7월에 발견된 밀성대군의 묘에 단(壇)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영남루능파각(凌波閣)에밀성박씨임시사 무소를 개소하여 그해 8월 6일에 밀양군청에 단소 건비부지대부신청서를제출하고기부금모금일 을추진하였다. 밀양군청에서는역사와가보(家譜)에있는대개 (大槪)조사와300년전의치제(致祭)한일들을종 합적으로 검토하여 1923년 5월 1일 경남도청에 소 요부지 대부허가신청서를 진달하였으며 경남도청 에서는사실조사와행정절차를거쳐서1924년2월 18일 밀성대군 단소로 사용할 부지(국유지) 12평 의무상대부를인가하였다. 종약소에서는 그 이후 5월 3일 대종회에서 의결 한 당시 도면대로 사업을 진행하여 1925년 9월 2일 밀성대군 지단 단소를 준공하게 된 것이 100년 전 의일이다.우리인간은태초부터천제문화(天祭文 化)로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하는 의식이 일상화되 어 사람들을 하늘과 연결하고 마을과 국가를 결속 시키는 중요한 역할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의 왕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으로서 제사를 주 관하였다고전해지고있다. 우리밀성(밀양)박씨후손들은밀성대군지단건 비 100주년을 맞이하여 올 한해를 밀성대군 지단 단소 참배의 해로 정하여 가족단위 또는 대븡소 문 중에서 참배하는 숭조 행사를 채택해보시기를 권 고해봅니다. /자료제공밀성(밀양)박씨대종회(전)총무이사박영호 밀성대군지단단소건비100주년 뷺참배의해로정하여선조의얼받들자뷻 밀성대군단소,경남밀양시영남루 경내 전국종원에게보낸통고문일부 병자란(丙子亂)이일어난뒤에격문(檄文)을돌 려 의병을 일으켰다가 화의(和議)가 이미 이루어 졌음을 듣고는, 뷺산에 들어가 숭정 처사 되기 소원 이오, 세상에 나가 병자년 백성 되기 부끄럽다뷻는 등의 시구를 지어 벽(壁)에 쓴 뒤에 자취를 감추고 일생을 마쳤으므로 세상에서 븮숭정처사븯라 일컬어 졌던 국담 박수춘 선생의 부인 월성김씨 기제사가 지난 21일 밤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국담재에서 있었다. 이날 제향은 국담종중이 수경 회장의 집례로 정 현 종손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재천 총무가 독축 하였으며,이어쾌흠,문흠현종이아헌과종헌으로 잔을올렸다. 박수춘의 자는 경노(景老), 호는 국담(菊潭)으 로 1572년(선조5)11월 경남 밀양군 부북면 삽포리 에서 아버지 동몽교관 무진재(無盡齎) 박신(朴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국담은 어릴 때부터 충 효절의학덕을고루갖춘명문가집안에서성장하 면서학문을쌓았다. 1592년 21세 때 임진왜란을 만나 부모 형제와 청 송으로 피난하였으나 1593년 봄 전염병으로 부모 와형제자매5인등모두7명을한꺼번에잃은국담 은일생에서가장어려운시기였다고그의국담추 선록에 적고 있다. 국담은 그 때 나와 누이동생만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고 일곱 시신을 차례로 묻었 지만 난리 중이라 장례절차마저 갖출 수가 없어 “하늘에사무치는원통함이여!땅이꺼지는슬픔이 여!내 일 백번 고쳐 죽어도 이일만은 잊을 수가 없 구나!”하고통곡했다. 1597년국담은밀양으로돌아오면서장례경비를 마련하여 반장(返葬)을 완수하였다. 이 해에 정유 재란이 발발하자 국담은 피란 후 옮겨간 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 성에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산성을 고수했다. 국담 은 적도(賊徒)의 토벌을 마음에 다져 부끄러움을 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무리를 모으고 의병을 합 하여감히권왕(勸王)의뜻을펴려했다.군문을향 하여 적개심을 돋우고 우서(羽書)를 날려 뜻을 전 한다는것으로시작되는창의격(倡義檄)을남기기 도했다. 국담 선생은 1599년 월성 김씨 교관 김우용의 딸 과 혼인을 하고 경북 대구부 남산에 복거(卜居)하 고병자호란후경북청도풍각현에은거하면서도 학자로서 삶을 살다가 1652년(효종3) 11월 81세로 세상을 떠났다.당시 밀양과 대구부의 사림부터 야 로(野老)와 산승(山僧)까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며 장례에 참석한 자가 4,5군(郡)에 이를 정 도로 많았다고 한다. 1672년 (현종13)에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추증되고 영구히 사당에 위패를 두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부조묘지전(不 튐 廟之典)이 내려져선생이서거한음력11월5일과부인월성김 씨의기일1월24일에제향을올린다. 한편 국담종중은 오는 4월 20일 종중 활성화와 종원 단합을 위한 선조유적탐방 및 단합대회를 갖 기로하고많은종원들이참여하여성원이될수있 도록당부했다.문의박재천총무010-2472-8562 숭정처사국담박수춘선생의부인월성김 씨기제사봉행 1599년결혼,궁중의규범이있어힘써내조하고양육븣국담종중오는4월20일선조 유탐방계획 국담박수춘선생의부인월성김씨기일을맞아종원들이엄숙한분위기속에서제향을모시고있다. 제향후에신주를사당에모시고있다. 서원은지역에세워진사립고등교 육기관으로 선례후학(先禮後學)이 라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 다. 전자는 훌륭한 인물을 높이고 오 래도록기리고자사당을세워선현에 게 향화(香火)를 올리는 ‘제향기능’ 이고, 후자는 선현의 학덕을 계승코 자 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내 는‘강학기능’을말한다. 명곡서원은 무신 박성양(朴成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 역민의교육과후진양성을위해순조 18년(1818)에 창건되어 철종 2년(185 1)에 사액되었고, 고종 5년(1868) 대 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그 뒤 1905년 명곡서당으로 후학양성기 관으로 운영되다 1975년 명곡서당을 명곡서원으로복원되었다.이처럼교 육기관으로서의강 학공간과제향공간 을 양분해 전학후 묘형(前學後廟型) 을 취해 금은선생 의 높은 학덕과 충 의정신을 기리고 있다. 특히 명곡서 원은 종원들의 구 심점 역할을 함으 로서 종원들이 선 조를 위한 숭조심 과 함께 돈독한 정 을나누고있다. 지난 2일 가진 세알례 행사는 최 근 보기드문일이지만명곡서원의세알 례는 오랜 전통과 우리 고유의 문화 를간직하고있다. 세알례(歲謁禮,또는 正謁)는 새해 정초인정월초닷새에사당에배향된 선현에게 세배하는 우리 전통 고유 행사이다. 한편 전통행사로 자리잡은 세알례 를 의성군 관계자가 참관한 가운데 종원30여명이함께하면서새해세배 행사를겸하고종중의대소사를의논 하고 덕담을 나누면서 새해 설계를 함으로서건전하고뜻있는하루가되 어귀감이되고있다. 명곡서원은 2020년 의성군문화유 산제37호로지정되었다. 함양박씨명곡서원세알례((歲謁禮 )가져 선조의음덕을기리고종원간덕담을나누면서새해설계 명곡서원세알례에참여한종원들이기념촬영을하고있다. 의성군 문화유산 제37호로 지정된 명곡서원의 세알례를 군청관 계자가참관한가운데박연탁종중회장이분향을마치고내려오 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