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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8월31일 토요일 7 (제212호) 관향조 종친회 11월에왜군이철군하였으므로12월에귀가하여1599년(선조3 2)사월유시번 선생에게 다시가서 수학하였고 1600년에는 모당 손처눌(慕堂孫處訥)선생에게수학하였다. 1606년(선조39) 2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참군(정7 품)이되고1608년훈련원주부,1610년(광해2)선전관,1613년(광 해5)부사직(종5품),1615년 사직,1618년용양위부호군(종4품)1 615년오위도총부경력(종4품),1621년통훈대부철산군수,1625년 (인조3)벽동군수(평안북도의북쪽중앙에위치하는한군),1631 년훈련원부정(종3품),1633(인조11)절위장군용양위상호군(정3 품), 1634년(인조12)가선대부로 승차함에 3대 추증에 따라 아버 지(휘 蕃)는가선대부 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 관,조부(휘謹遜)는통정대부호조참의,증조부(휘雲達)는통정 대부통례원좌통례로각각추증되었다. 1636년(인조14) 12월 10일 청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서울근교 에육박하자인조가남한산성에피신할때호종하여산성으로들 었으나 주화론에 따라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주전(主戰)을 주장하다 이에 미치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 로 돌아와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매진하다 3년만인 1639년(인조1 7) 별세, 가정대부 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에추증되었다.아들종립(宗立)·종양(宗亮)종희(宗熙) ·종복(宗福)·종간(宗幹)을 두었는데 장남 종립(宗立)의 字는 윤 조(允祖) 또는 광조(光租)이고, 호는 석정(石庭) 또는 동강(東 崗)으로 선조 정유(丁酉,1597)년에 태어나 국담 박수춘(菊潭 朴 壽春) 선생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인조5년(1627)에 무과 에 급제하였다. 전력부위, 용양위부사맹, 훈련원봉사, 용양위사 맹, 세자익위사좌부솔, 세자익위사좌익찬, 통덕랑 성관도찰방, 선전관,어해장군행어란만호,통훈대부행사천현감을끝으로임 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만년에 임천(林泉)에서 경서를 즐 기다효종기해(己亥,1659)에영면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어란 만호에 제수한 공의 기록이 있어 덧붙인 다. 뷺인조17년기묘(1639)6월20일(병오,맑음)이비가이상형등에 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비가 이상형(李尙馨)을 집의로, 조석윤 (趙錫胤)을사인으로,권의중(權義中)을한성부서윤으로,-생략-- 박종립(朴宗立)을어란만호(魚蘭萬戶)로삼았다.뷻 석정공(휘 종립)의 9대손 재호(在鎬)는 호(號)가 춘강(春崗) 으로 숭덕전참봉으로 시조왕릉의 혼의석(魂 石)을 봉존(奉 尊)하고 알영정 비각을 자부담으로 중수했다. 그리고 아들 성형 (城亨) 준형(埈亨) 형제에 이르기를 선도산 성모사 중건을 부탁 했다.성형(城亨)의보명은순원(淳原)으로호(號)는휘당(暉堂) 이다.지극한 효성으로 봉선(奉先)에 소홀함이 없었다.신라섬유 을 창업하고 대구상공회의소장과 밀성박씨대종회장 등을 역임 하였으며,신라여자종합고등학교(현 대구동부고등학교)를 설립 육영사업에 매진하고,율산서원을 건립하여 선영봉사와 지역 유 림발전에크게기여하였다. 10세손 순국(淳局)의 호는 낙원(樂元)으로 1939년(己卯)년 흉 작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지역주민을 구휼하여 지역주민들이 다 수의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으며, 숭덕전 전(殿)참봉에 피선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장자 해정(海楨)은 자(字) 홍지(洪之) 호(號) 청소(靑蘇)로 일본 동경대 법학부의 특대생(特待生)으로 졸업하여 경북경찰학교 부교장, 안동경찰서장, 경북경찰청총무 과장, 제헌국회의원, 3,4,5대 민의원, 제2공화국 교통부장관, 재무 장관 서리 등을 지내고,대한민국 건국공로무궁화대훈장을 수훈 했다. 차남 선정(善楨)은 자(字)가 응지(應之)이며 호(號)는 청 사(靑 范 )로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문학박사이다. 경산대 학교교수로후학을양성하였으며,한국한문학회부회장,박씨대 종친회 대구본부회장,규정공파대종회 고문을 지내는 등 종중의 체계를다듬고세우는데공헌지금의종중체계를갖추었다. 정재공(휘번)의차남광득(光得)의字는위빈(偉彬)으로선조 신사(辛巳,1581)에태어나창신교위행훈련원주부이다.아들춘 립(春立)·사립(士立)을 두었는데 차남 사립(士立)이 훈련원 판 관을지냈다.정재공의삼남천득(天得)의字는경직(敬直),호는 죽포(竹圃)이다. 예빈시 직장을 지냈으며 아들 원립(爰立)·명립 (名立)·창립(昌立)·녹립(錄立)등 사형제를 두었는데 차남 명립 (名立)이사복시부정이다. 송재공(휘謹孫)의삼남란(蘭)의자(字)는성필(成弼)호(號) 는백헌(栢軒)으로압량백헌문중의파조이다. 송재공의 사남 포(苞)의 字는 성익(盛益), 호(號)는 송고(松 皐)이니후손들은송고공파라한다. 경근당공(휘 根孫)차남 휘 연 의 자(字)는 여후(汝厚)호(號) 는 벽오당(碧梧堂)으로 승지와 찬성사를 지내고 아들 맹동(孟 同)·중동(仲同)·계동(季同)을 낳으니 이들 삼형제가 전남 고흥 입향조이다. 장자 맹동(孟同)의 자(字)는 윤길(允吉)호(號)는 조수(釣 쑴 ) 성종갑진(甲辰,1484)년에태어났다.재주가뛰어나경서를즐기 었으며문장이당대에명성을떨쳤다.중종정묘(丁卯,1507)생원 시에올라1511년(辛未,중종6)직장(直長),1514년칠원(漆原,현 경남함안)현감(縣監)을지냈다.기묘(己卯,1519년)사화(士禍) 를당하여두아우를데리고고흥으로세거지를옮겨은둔하였다. 벽오당공(휘연)의차남중동(仲同)의자(字)는내중(乃仲)호 (號)는 라암(蘿菴)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1519년(己卯)에 과거 에응시합격하였으나사화를만나백형조수공과함께했으며,병 조참의에증직되었다. 벽오당공의삼남계동(季同)은연산조에진사시에올랐다. 조수공(휘 맹동)은 아들 지번(之番)븡지무(之武) 등 둘을 두었 는데장남지번의자(字)는자지(子知)호(號)는송은(松隱)으로 중종조에 통사랑(通仕郞)이고, 아들 국양(國亮)의 호는 해은당 (海隱堂)으로 선조 정축년(1577)에 훈련원첨정으로 임진년(159 2)에 파천하는 어가를 호종하였으나 적을 방어하는 대책은 크게 쓰이지못했다. 해은당의 장자 응상(應祥)의 호(號)는 묵재(默齋), 타고난 효 자이다.아버지병환에시탕(侍湯)이있어그분뇨를맛보기에임 종(臨終) 할 때에 단주(斷主) 하고, 주혈( 血)을 가리키면 언제나눈을뜨고여러번소생하였다.사후에어해장군겸동중추 에 증직되었다. 묵재공의 아들 하선(夏先)의 호는 강헌(剛軒)으 로 붓을 던져버리고 활쏘기와 말 타기 등 궁마를 익히어 160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주부를 지내고 인조반정에 공헌하고 가 선대부 동추에 이르렀다.그의 장자 운벽(運碧)은 효행이 뛰어나 음직으로 통정이고,아들 동진(東振)은 품성이 단아하고 학문이 뛰어나행의금부도사이고중훈대부에증직되었다.손자상문(尙 文)은통사랑으로가학을이어학문이뛰어났다. 강헌공(휘하선)의차남운극(雲極)의자(字)는극보(克甫)호 (號)는 송계(松溪)이다.우산 안방준 선생에 나아가 글공부를 하 여 문장이 뛰어나고 병자호란에 종제(從弟) 영발(英發)과 함께 분연히일어나병자호란에창의하여우산선생막하에달려가여 산에이르렀을때화친이되었다는소식을듣고통곡하면서돌아 와종신토록 두문 자정하며 의리(義理)를 바르게 하였다.예조참 판에 증직되었다.아들 치빈(致彬)은 문학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 이받들었으며효종8년(1657)가선대부병조참의에올랐다. 해은당공(휘국양)차남응신(應愼)의자(字)는인서(仁瑞)호 (號)는 석정(石亭)으로 선조 기축(己丑, 1589)년 행 군자감정판 관이고1594년아버지상(喪)에주자가례를따랐다. 아들 경남(慶南)은 제용감봉사 겸 훈련원주부, 손자 호(琥)는 증좌통례,증손만기(曼杞)는증통정첨추,만재(曼梓)는학문이 뛰어나향당이추중(推重)하고증통정대부동중추부사,만강(曼 康)은행어해장군용양위부호군이다. 해은당공의삼남응삼(應參)의자는사겸(仕謙)호(號)는겸재 (謙齋)숙종 무오(戊午,1678)년 직장이다.아들 익동(益東)은 증 가선대부, 손자 능원(能元)은 재주가 탁월하고 경사(經史)를 널 리 섭렵하였다. 관(官)은 직장(直長)이다. 증손 태복(泰福)은 행 (行)영릉(효종과인선황후릉)참봉을지냈다. 벽오당공(휘연)의차남라암공(蘿菴公)중동(仲同)의아들유 번(有蕃)의 字는 군화(君華)호는 동암(東菴)으로 1508년(戊辰) 에태어나1546년문과에급제하여북청판관,한성판윤을지냈다. 그리고그의아들은춘(殷春,호(號)동계,東溪)은1544년에태어 났다. 어릴 때부터 궁마 익히기와 병서 읽기를 좋아 하였으며 학 문을할때는밤새는줄몰랐다,1576년33세에식년무과에급제하 여 사재감주부, 첨정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에 첨사 김완과 함께 같이 거의(擧義)하고이 충무공진영에 달려가 합류했다.충무공 은공의지략과절의가뛰어남을크게기뻐하며함께계략을논의 하였으며,1592년5월4일첫옥포해전부터1598년10월왜교성전 투까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는 피령전(皮翎箭)으로 붉은 갑옷을 입은 적장을 쏘아 죽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고,적선(敵船)을 바다로 유인하여 30여척을 가 덕도에서침몰시켜크게이겨이소식을들은통제사이순신장군 은 공(公)을 조방장에 임명하였다. 또 수사 이억기 부사 진무성 첨정신인수등과합세독전하여여러고을을수복하여편안케하 였으며,1593년 진주성이위급하다는소식에이순신장군의탄식 함을듣고단신으로적진을뚫고성안으로들어가창의사김천일 복수장고종후병사황진현감송제등제장과방어지책을논의하 고돌아와적정을보고하는등맹장으로써이름을떨쳤다.1593년 7월 14일 한산도로 군영을 옮길 때 따라가서 민,병 합동 둔전(屯 田)을관리하여군량의자급에기여하였다.1597년2월26일권율 도원수와원균신임통제사가한산도에오고의금부도사가충무 공을 체포하여 갈 때, 공(公)은 원균이 통제사를 속이고 모함 하 였다고분노하여원균을죽이려고하자,이순신장군은이를만류 하였다, 인하여 국문하고 심문하였으나 은혜(용서)를 받고 돌아 왔다.1597년9월16일벽파진대첩(명량대첩)때는실전경험이있 는 장졸 160여명의 수군 재건 노력 및 충무공의 지략과 용맹으로 크게 이기니 해남현감 유형은 공(公)의 전공을 통제사에게 최고 라 추대하였으며,조정에서 듣고 인동부사에 특별히 제수하였으 나 나가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흉적들을 모두 섬멸하지 못하여 종묘사직이 위급하고 국가가 위태로운데 어찌 가히 휴양하고 자 적하리요”하고계속종군하였다.1598년 9월 20일~10월 4일에 조 (朝), 명(明) 연합군의 왜교성(倭僑城) 합동작전에서 명나라 육 군의배신으로조선수군이많은피해를입었는데,이때그도선두 에서서싸움을독려하고격려하며용감히싸우다가홀연히적탄 이날아와가슴에맞아절명에이르게되어서도북쪽을향하여꿇 어앉아 말하기를 “죽음을 당하게 되나 나는 신이 되어 적을 섬멸 하겠습니다”하고운명하였다.난(亂)이평정된후호조참판에증 직되고선무훈에녹훈되었다. 동계공(휘 응춘)의 아들 응수(應秀)의 字는 한서(漢瑞), 호 (號)는매헌(梅軒)으로1566년에태어났는데천성이강개하고효 성이 지극하였다,1588(무자)년 23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이 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한다는 말을 듣 고 즉일로 급히 가서 대가(大駕)를 호종하였고 행재소에서 물샐 틈없는경계등모든군사일을에성심을다하니.이를본윤두수, 이항복 두 재상들이 참 의사라고 칭찬하며 중부장(中部將)에 추 천하고환궁후에종5품훈련원판관(判官)에배수되었다.1598년 (戊戌)에는 부산 첨사로 진양(진주,양산) 지역에 배치 되었는데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복수를 결심하고 왕에게 아뢰 니선조는그뜻을아름답게여겨말과화살300개를하사하였다. 노량진에이르러먼저아버지의묘에곡하고이순신장군을만 나 본 후 노량해전에서 무수히 많은 적을 살상하고,정기수 이완 등과함께합세하여싸우다가적탄에맞아전사하였는데두눈을 부릅뜨고 쓸어 지지 않고 서있었다,이 소식을 통제사가 듣고 제 문을지어제사를지내자스스로쓸어지니모든사람들이기이하 다 하였으며,이 날이 11월 18일 이었다,이때 공(公)의 나이 33세 였고,부자가 함께 임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난이 평정된 후 선 무훈에녹훈되었다.동계공(휘은춘),매헌공(휘응수)두부자의 기록은 대한충의록, 해동윤강록, 호남절의록, 호남지, 한국인물 사전, 환여승람, 호남문헌보감, 고흥지, 충무공전서(여수충민사 발행),신도비명(두곡),기타 두산백과,웹문서 등에 등재되어 전 해진다. 매헌공(휘 응수)은 아들 경추(慶秋)·경상(慶祥)·경운(慶云)· 경민(慶旼) 등 사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경추(慶秋)는 호(號)가 사고당(四固堂)인데 1584년생으로 체격이 크고 뜻과 기개가 탁 월하였다,1614광해갑인년31세에충량과에급제하여북청판관, 사헌부장령을 역임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안변부사로 있으 면서 무과급제한 군관인 경상(慶祥) 경운(慶云) 두 동생들과 의 병수백을모아근왕병을이끌고7일밤낯으로내려오던중화의 가성립되었다는소식을듣고서로비통해하다나라가이런치욕 을당하였는데무슨면목으로관직에있겠는가하고병력해산과 관직을 사의하고 귀향하는 등 3대에 걸쳐 충의가 특출하다.그의 손자 만신(曼信)은 천성이 순효(純孝)하였고, 그 부인 경주이씨 의시부모섬김에극진하였다.사후에여자의몸으로시묘살이에 버금하는효를하여사림의포양( 揚)이 있었다. 매헌공(휘 응 수)의 차남 경상(慶祥)의 호(號)는 의수(義 쑴 )이다.1616년 무과 에올라통예랑을지냈다.병자호란에동생경운(慶云)과종형안 변부사와 함께 거의(擧義)하여 교하 땅에 진군하는데 화의가 이 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도 양 대봉마을 비봉산 아래에 은거하며 평생을 소영(嘯詠, 시가를 운율에따라외거나읽음)으로일생을마쳐가선대부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슬하에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휘는 옥(沃),자는 서현(瑞玄)호 (號)는 죽담(竹潭)으로 성품이 온순하고 자애로워 일찍이 과업 (科業)을 포기하고 별서(別西)에 대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으 며,일찍이자손에게경계하기를,부귀를탐하지말라하였다. 매헌공(히휘 응수)의 삼남 경운(慶云)의 호(號)는 모암(慕庵) 으로 1589년에태어나광해 신유(辛酉,1621)년에 무과에 올라용 양위부호군, 사과를 지냈다. 병자호란에 형 의수공과 함께 거의 (擧義)하였으나 화의소식을 듣고 돌아와 고흥군 금산으로 들어 가은거하여두문자정하였다.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이다. 매헌공의넷째경민(慶旼)의호(號)는추암(追庵)으로사재감 직장을 지냈다.매헌공의 11세손 휘 영근(永根)은 행실이 남달라 암행어사의 천거로 건원릉참봉을 지냈으며 장남인 휘 형득(炯 得)의 자(字)는 덕재(德哉) 호(號)는 남파(南坡)이다. 1923년 하 구정을 지어 고흥뿐만 아니라 호남의 문인들도 드나드는 교유의 장으로서,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섰으며,1932년 『매천시집』을 간 행배포하여매천황현이추구하는까치가치를따르고자했다.특 히고흥문중활동에도주도적인역할을담당하여1935년 문중사 우인숭양사의건립임원을맡았고,문중에서충효와열행의행적 이있는이들을모아‘밀양박씨규정공파삼강통보’간행을추진하 기도했다. 돈수공(휘 경신, 참판공의 아들)의 차남 정손(楨孫) 은 성균관 직강(直 講), 사인(舍人), 검상(檢詳)과 이 조정랑을 지냈으 며, 아들 논문(論 文)의 字는 여문 (汝文) 호(號)는 퇴사정(退思亭)이 다. 성종조에 참봉 과홍문관교리를지냈다.김종직의문인으로중종조무오사화를 피해서울에서낙향하여전북부안으로은거했다.은진송규헌선 생은 퇴사정공의 재사 기문에서 “옛날 중종 무오년의 화는 간흉 이 권세를 부려 바른 사람과 단정한 선비들이 거의 쫓겨났지만, 당시에는퇴사정박선생같은분이관직을그만두고시골로돌아 가서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다가 부풍현(현 부안군)남주교촌 도 리산 아래에 터를 정하고 이름과 행적을 숨기고 살았다븣.”라고 소개하고있다. 퇴사정공(退思亭公)은아들계산(桂山)·춘산(春山)형제를두 었는데 장자 계산(桂山)의 字는 내호(乃浩)이다. 성종 정유(147 7)년에 태어나 무과에 올라 주부와 군위현감이다. 아들 은동(殷 東)의 호(號)는 운곡(雲谷)으로 중종조 신묘(辛卯,1531)년에 진 사시에 올랐다.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세림(世琳)이고 차자 는 세문(世文)인데 예조참의를 지냈으나 후손들이 수단을 접수 하지않아족보에나타나지않고있다. 장자 세림(世琳)의 字는 임옥(林玉)호(號)는 자강재(自疆齋) 이다.일재(一齋)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종유하였다.하서 김인 후,미암 유희춘,옥계 노진,고봉 기대승,건재 김천일,오봉 김제 민,도탄변사정과친한벗으로지냈다.자강재잠(自疆齋箴)을짓 고권면하기를“큰도는어찌할수없으니어찌공부에힘쓰지않 으랴”하였다. 예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아들 만억(萬億)·만종(萬鍾)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만억(萬億)의 호 는 청재(晴齋)이다.그는 아들 승길(承吉)·몽룡(夢龍)을 두었다. 장자 승길(承吉)은 증 통훈대부 장악원정,그의 아들 명춘(命春) 은증참의,손자진원은증동지충추부사,진립은증호조참판,증 손시하는증자헌대부동지중추부사이다. 청재공(휘 만억)의 차남 몽룡(夢龍)은 증 통정대부 좌승지,그 의 아들 영호(英浩)는 증 예조참판,손자 진선(進先)의 자(字)는 선미(善美) 호(號)는 만재(晩齋)이다. 기개와 도량이 크고 뛰어 났으며, 무력이 절륜하였다. 여절교위수훈련원판관으로 부모의 상을 당해 예를 집행함에 빠진 것이 있을까 두려워서 ‘주자가례’ 를 읽었으며,조석으로 음식을 올리는데 한 결 같이 예제를 따랐 다.상례를 마치고,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만년에 도암 이재 선생에게 배워 오로지 학문을 일삼아 거의 침식을 잊었다. 원근에서그덕에훈도된사람이많았다. 만재공의 5세손 민술(敏述)호(號)는 죽헌(竹軒)으로 고산 임 헌회선생의문인이다.타고난성품이정직하고효도로편모를받 들었다.학문을실천하고독실하였으며,자신을단속하고스스로 지켰다.남을가르침에게으르지않았고,베풀기를좋아하여가난 한사람을구휼하였다.사사로운돈주머니를경영하지않았고,남 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산림에 은둔하여 살았다. 유고가 있다. 죽헌공의 아들 동훈(東勳)의 호(號)는 춘포(春圃)인데 문 장이박식하고학문이뛰어났다.세상이자리를청하는것이형세 상소탈하고고상한것으로한번보고는마음에기뻐서성실하게 따르고공경히용납하여무릎을꿇지않음이없었다.송사기우만 과질의를많이주고받았다.깊은견해를받들어칭찬하였으며유 고(遺稿)가 있다. 퇴사정공의 차남 춘산(春山)은 훈련원 첨정을 지냈으나병선(兵 縫 )으로인해문적이소실되어안타깝다. 참판공의 선조는 관직을 따라 대대로 한양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참판공이호조참판을끝으로39년의관직생활마 치고 1449년(己巳)8월 7일 壽 76세의 일기로 하세하면서 전북 완 주군용진면상삼리각씨산에안장되었다. 이는 어머니 밀산박씨의 묘소가 부근인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에위치하고있어참판공이태어난곳도전북완주군용진면이아 닌가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후 관직에 몸담으며 한양에서 세거 한다.경근당(휘 근손)의 아들 빈(彬)은 성균생원으로 아들 요산 공(휘 운달, 雲達)은 1491년 3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나 1516년 26 살에무과에 등제하여 봉상시주부(종6품)에이르렀고직분을 받 듦에공정하게처리했다.아첨하거나물러나는태도가전혀없어 동료들이 모두 공경하면서 꺼려했다. 이후 “벼슬은 나의 학문을 펼치고나의뜻을행하여임금에게충성하고백성에게은혜를베 푸는것이다.그렇게되지 않는다면 내가좋아하는것만 못하다.” 고하고마침내벼슬을버리고호서(湖西)의청주로물러나살면 서경전에힘써서그앎을지극히하였고자신에게돌이켜실천하 였다. 뒤에또다시영남의자인현대원리(현진량읍대원리)로옮겨 은거하며 성리(性理)를 탐구하며 오직 책만을 가까이하였다. 이 로써경북경산의입향문호가열린다.그리고부인원주원씨와의 사이에한명의자식을낳았는데,성균생원을지낸휘근손(謹遜) 이다.근손(謹遜)은4남을두었는데장남총(叢)은일찍사망하였 고,차남번(蕃)은무과에급제하여태천현감을지냈고,승정원좌 승지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후손들은 진량읍 다문리와 대 원리에산거하며제일번성하였다. 삼남란(蘭)의후손은압량면신월리와당리등에,사남포(苞) 는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으며 후손들은 진량읍 속초리를 세거지 로인근의광석리,마곡리,금호읍냉천등에산거하고있다. 그리고 성균생원 빈(彬)의 셋째 밀예(密裔)의 후손들은 전북 남원과전남옥과를거쳐현재경북영덕군병곡면백석리에세거 하며집성촌을이룬다. 벽오당공(휘 연)의 아들 삼형제(맹동·중동·계동)는 전남 고흥 군두원면에 산재해 있다.고흥으로의 입향시기는 1519년으로 추 정된다.칠원현감을역임한입향조휘맹동은기묘사화가일어나 자두동생(중동,계동)과함께고흥으로은둔하기에이른다. 첫째맹동의묘소가대산리입구에있다.입향조묘소와승효재 (承孝齋)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대산리는 휘 맹동(孟同)의 후손 이, 왼쪽 와룡리와 숭양사(崇陽祠)가 자리한 두곡리는 휘 중동 (仲同)의후손들이집성촌을이루며496년을이어왔다.와룡마을 입향은 둘째 중동의 13世 휘 태진(泰鎭, 1791~1835) 공(公)이 학 곡리두곡마을에서옮겨와터전을마련하여7代에거쳐세거하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하구정(何求亭, 고흥군 향토문화재 제9 호)이있다. 셋째 계동은 두원면 지곡리에 각각 묘소가 있어 대산리, 학곡 리,지곡리에각각세거지를정한것으로추정해본다. 라암공(휘중동)의현손의수공(휘경상)과모암공(휘경운)은 병자호란에 화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통곡하며 고향 두원면 두곡 으로돌아와다시도양읍봉암리대봉마을과금산면석정리깊숙 한곳으로은거함에따라의수공의후예는고흥도양읍,모암공의 후예는고흥금산면에각각산재해있다. 참판공의 아들 돈수공(휘 경신)의 차남 충재공(휘 정손)은 서 울에서관직에있으면서아들퇴사정공(휘논문)을낳았다,그리 고연산군무오(1498)년사화때벼슬을버리고전북부안군주산 면 소주리에 은거하면서 500여년 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퇴사 정공의 아우 태무(泰武)는 전남 보성군 율어면 산정마을로 낙향 세거지를정했다. 요산공(휘운달)묘소:경산시진량읍현내리산112 율간서원-경북경산진량읍다문리:휘당박성형공이건립했다. 백헌공후예추모당:경북경산시압량면신월리산19-2 고흥입향도휘맹동의묘:전남고흥군두원면대산리 하구정,전남고흥군두원면 부안 입향조 묘역과 재사 퇴사정:전북 부안군 주 산면소주리 집성촌 고흥숭양사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