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2024년7월31일 수요일 7 (제211호) 기 획 연산군 2년(1496) 23세의 나이 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정 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교서 관정자(校書館正字)를 시작으로 조정의요직을거쳤으며자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으며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청백리로 선록(選錄) 되었다. 시와 문학에 남다른 식견 과 조회가 깊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문간(文 簡)이다. 선생이 외직인 전라도사(全羅 都事)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해 8 월 나주의 금성관(錦城館)에서 우 부리(牛夫里)를 곤장을 때려 죽게 하였다. 그때 연산군이 우 부리의 딸을 들여 놓고 총 애하였다. 우 부리는 천민 의 자식으로 은총을 믿고 멋대로 횡포 하게 굴며 남 의 부녀자를 약탈하고 전 원 ( 田 園 ) 을 빼앗아 조야 ( 朝 野 ) 에 서 그것을 근심 하였으나 그 죄를 바로 다 스리는 자가 없었다. 이때 에 와서 선생 이 그를 장살(杖殺)하였다. 선생이 그를 죽이고는 화를 면할 수 없으리라생각하여명령을기다리려상경하던중고양이가나타 나길을인도하여가는길이었다.연산군이우부리가죽었다는소 식을 듣고 곧 잡아오도록 명했는데 선생을 잡으러 온 김오랑(金 吾郞)의길이선생과어긋났으며,마침중종반정(中宗反正)이있 어화를면할수있었다. 중종14년(1519)11월기묘사화가일어나같은때의동료(同僚) 들이화를입었다.선생은국왕으로부터는미움을받았으나동료 사림(同僚士林)들로부터는 인정을 받아 그 후 곧사유간택(師儒 揀擇)의 후보자로 천거되었고,己卯士禍 때에는 상중(喪中)이어 서 화를 면했으나 그는 기묘명현(己卯名賢)과 뜻을 같이 하였다. 선생과 함께 신비복위소를 올린 김정은 기묘명현의 한사람이었 으며, 선생의 처신은 기묘명현과 일치하였다. 그러므로 퇴계(退 溪) 이황(李滉)과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은 선생을 ‘기묘완 인(己卯完人)’이라고추숭(追崇)하였다. 문간공은 아들 삼형제(민제, 민중, 민고)를 두었으며 장남 휘 민제(敏齊)는의지와기개가뛰어났다.가학을이어받아약관(弱 冠, 20세)이 채 못 되어 경전(經傳)과 사기(史記)를 통관(通貫)하 고 문채(文彩)는 선비로 추앙되었다.일찍이 무과에 올라 사헌부 감찰,훈련원판관을역임하고외직으로김해도호부사를지냈다. 관직에 임하여 청직(淸直)한 정사로 그 치적을 세상에드러났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인수(仁壽)는 학생이고 차남 희수(希 壽)는동생민중이후사가없어대를이었다.그리고장남인수또 한 후사가 없어 동생 희수의 장남 진(璡)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했다. 문간공의 차남 민중(敏中)은 일찍부터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이 뛰어나고 18세 되던 기묘년(151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 다. 글 제주를 겨루는 데는 서울의 여러 선비가 그를 서진(西晉) 의장원급제할것이라지목했다.평생저술한것이병화(兵火)로 소실되고 다만 무왕불포록(武王不褒錄)과 이재론(夷齋論)한편 이 있어 동문선(東文選)에 들어있고 또 선집(選集)에 부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졸하면서 그 꿈을 펼치지 못했다. 그리고 후사가 없어 백형 김해도호부사(휘 민제)와 창녕성씨와 의 사이에 둘째로 1540년(중종35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을 후사 로삼았다.그의휘는희수(希壽),자(字)는덕로(德老)호는회헌 (悔軒)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종숙부 사암 문충공(휘 순)이 일찍이 칭찬해 자랑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다.”라고 하였다. 회재 박광옥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제봉고경명선생을따라수업(受業)하니기대가컸었다. 음직으로 후릉(厚陵, 정종과 정종의 비 정안 왕후의 능)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회재 선생과 광주 목사 정윤우를 만나 말하기를 “적병이 아직 재를 넘 어오지 못했으니 각 고을을 동원하여 요해지(要害地)를 튼튼히 지키면 막을 수 있으니 적의 허술한 곳을 틈타 곧바로 올라갑시 다.”하니 정 목사가 그렇겠다.하고 완영(完營,오늘의 도청)으로 달려가 순찰사 이광에게 강력히 말했지만 이광이 막연히 응답이 없어 정 목사는 착잡한 심정으로 돌아오게 되었고,이 때문에 민 심이 울분에 쌓여 있었다. 이에 이 사실을 행재소의 임금에게 알 리고돌아와회재,제봉및제종형대수,재종질전감찰지효와더 불어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광주목에 의청(義廳)을 차리고 제 봉을 추대하여 좌도대장을 삼고 회재 선생을 맹주로 삼아 가동 (家뚝)60여명과 양식 80섬을 내어 모집하여 한편으로 싸움에 임 하고 한편으로는 지키면서, 또 종매서 해광 송제민과 함께 한쪽 동지선비들을일으켜전부사김천일을추대하여우도대장을삼 아호서의장중봉조헌으로더불어성세(聲勢,명성과위세)상응 (相應)하여 양호(兩湖)를 막아낼 계획을 세우고 스승 회재와 의 논하여 고을의 자제 500여명과 이웃고을에 격문을 띄워 정예병 수천을얻어권율의부대에배속시키는등호남을지키는큰역할 과공을세웠다.이에7월에행조로부터한성부참군,군기시주부 를 연달아 제수 받았다. 이후 형조좌랑에 제수되고 권무과 제록 원종훈(權武科第錄原從勳)을 하사하였다. 난이 차츰 평정되자 함열 현감이 되었다. 부인 경주이씨와의 사이에 진(璡), 선(瑄), 전( 큇 ) 삼형제를 두었는데 생부 김해부사의 아들 인수(仁壽) 공 이후사가없어진(璡)을보내어대를잇게했다. 좌랑공(휘 희수)의 장자 선(瑄)은 성품과 도량이 크고 가학으 로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해박(該博)하여 문장이세상을 울렸다. 일찍이궁마(弓馬)와사예(射藝)를익히어선조기해(己亥,1599) 무과에올라여러벼슬을거쳐사옹원봉사,진용교위선전관에이 르렀으나광해의폭정을보다못해벼슬을버리고낙향하여끝내 벼슬길에나가지않았다.그리고후손들은봉사공이라칭한다. 차남전( 큇 )의호는매헌(梅軒)으로증사복시정이다. 봉사공(휘선)은슬하에아들시영·시우형제를두었는데장남 시영(時英)은 가학을 전수받아 학문에 능했고, 사원(思遠)·사도 (思道)·사하(思遐)·사형(思逈) 등 4형제를 둠으로서 크게 번성 하여문간공의후예중대다수를차지한다. 장남사원(思遠)의字는중구(仲久)호는정은(靖隱)으로선조 25년 임진(壬辰, 1592)에 태어났다.병자(丙子,1636)에 남한산성 이포위되었을때청강조수성이화순에서의병을일으켰는데공 이 참봉 고무립,별제 신필,류동환,으로 더불어 유사(有司)가 되 어강개(慷慨)분기(奮起)하니운암이기발,거오양만용등의격 문이 또한 도착했다. 곧 군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아 청주에 도 착하니 화친이 성립되었음을 듣고는 분향 통곡하고 돌아와서 숭 정일원(崇禎日月,조선의해와달역시명나라마지막황제의종) 네글자를써서자리오른쪽이붙이고세상일을잊고임천(林泉) 에 소요(逍遙)하니 세상 사람들이 숭정처사로 일컬었다. 처사공 의 현손 전( ,만동의아들)은서적을스스로즐겨영달을구하 지않으니 향촌에 사람들이 고상(高尙)함을 일컬었다.정조 무오 (戊午,1788)년행의(行義)로 도백의추천이있었고,별세한 뒤에 도내 사림이 특별한 명망으로 도백에게 글을 올렸으나 이루어지 지않았다. 처사공은 아들 형제(초·금)를 두었는데 차남 금( )의 자는 사윤(士潤) 호는 충정(忠靖)으로 효자이기에 효자공이라 불린 다. 어버지가 침병으로 위독(危篤)하니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하 고대변을맛보아증세의차도를실험하며백방으로탕약으로구 해봉양하여완쾌되었다.이에칠순의아버지는아직어림에도이 처럼정성을다하는모습에감동하였다.이에조정에서는이사실 을알고진실로순수한마음에서나오지않았다면불가능한일이 라며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별급(別給)하였다. 15살 되던 해아버지의병환이위독함에손가락을잘라수혈하여수일간소 생하였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상(喪)을 치르는 동안 례(禮)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려묘 3년(廬墓三年)에 비둘기 가여막으로찾아들었다한다.이는비둘기마저도지극한효성에 감응 한 것이라 전한다. 이후 어머니가 또 병환이 위중함에 백약 이무효하고창농(瘡膿)이더욱심하여선생이입으로빨아농을 제거하여 치유하였다.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아버지 때와같았고여묘3년동안정성을다했다.탈복후에도초하루보 름사당에분향알묘를게을리하지않았다. 선생은 학문에도 뛰어났으며 우암 송시열 선생이 소인배들의 모함에 유배되었을 때 종제 논(從弟 )과 합소(合疏)하여 구명 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863년(철종14) 11월에 정려가 내려지고 통덕랑에 제수되고 자손들의 부역을 면제하라는 은전(恩典)이 내려졌다. 효자공(휘 금)은 재무·재빈·재관·재겸 등 4형제를 두었다. 장 남 재무(再茂)의 현손 정휴(鼎休)의 호는 둔고(遯皐)이다. 특이 한자질이있어가정에서복습하였고,성장해서금곡송래희선생 을스승으로모셔중용·대학·논어·맹자등의의심나는뜻의문답 과 성성설, 태극론에 대해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아버지상을만나사는집후원에장례를모시고매일 아침가서곡하고슬피상함이예(禮)에넘치며어머니상을당하 여하나같이아버지와같이하였다.유집으로둔고집이있다. 둔고공의 손자 용주(用柱)의 호는 송사(松史)인데 고종 신미 (辛未,1871)에광주소촌동집에서태어났다.18세에명경과에올 라벼슬이홍문관교리에이르니한때명망있는공경(公卿)들이 모두 장려하고 자랑하여 성화(聲華)가 대단하였다. 갑자기 아버 지의 병환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위급하자 잠자리에 들지 않고곁을지키며대변을맛보아병세를징험하고손가락을베어 주혈(注血)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집례를 매우 잘하고 잣나무를 휘어잡고 슬피 울부짖기를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이후 다시 서 울로가홍문관지제교겸경영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지내고어 머니상을만나아버지때와같이정성을다했다.경술년(庚戌,19 10) 한일합방 이후에 장성 아곡으로 이거하여 항시 삿갓하나를 쓰고 천일(天日)을 보지 않으며죄인으로 자처했다.조부 둔고공 의문집을편찬하였다. 효자공의 차자 재빈의 셋째아들 현동의 호는 석은(石隱)으로 아들6형제를두면서종중이크게번성하게된다. 좌랑공(휘희수)의증손사도(思道)의현손병(炳)은효행으로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이다.고종무자(戊子,1888)에공과부인 의효행정려가내려지고송사기우만선생이기문을지었다.공은 어버이병환에의대(衣帶)를풀지않고밤낮으로하늘에빌어마 침내 회천(回天)함에 이르니 향리에서 감탄하였다. 부인 해주오 씨또한남편을따라지극한효성으로어버이를봉양하였으며,남 편이죽자대상을치르고함께따라갔다. 휘 시영의 셋째 사하(思遐)는 만력정사(丁巳, 1617. 광해9)에 소촌리집에서출생하였다.겨우10세에아버지상을당해성인보 다도더예법을따랐으며,학문이뛰어났다.인조22년(1644)문과 에급제하여승문원에들어갔다.준례에벼슬을옮기면글을짓게 되는데 이 때 신진(新進)이 있어 천거하니 김좌명(金佐明)이 자 기와다르다하여배척하자정색하여말하기를“무릇사람을취하 는데는마땅히어질고어질지못함을가려야하는데어찌자기와 다름을 논하겠는가?”하여 말이 매우 정직하니 김좌명이 사사로 이 어느 사람에게 “박 아무개는 고집이 있어 흔들리지 않아 눌재 의유풍을거의떨어뜨리지않았다.”하였다. 승정원 주서와 승문원박사를 역임하여 후손들은 박사공이라 한다.모친상을당해슬퍼하여상함이예(禮)에넘쳐복(服)을마 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짧은 생을 마쳤으니 향년 32세로 출 천지효를다한효자이다.그의아들정(晶)은또한뛰어난문행으 로세상에알려졌다. 좌랑공(휘 희수)의 손자 휘 시영(時英)의 넷째 사형(思逈)은 아들 논·린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논은 성균생원이다.검암 박치 도공에게나아가배웠다.숙종임술(壬戌,1682)생원시에합격하 였다. 나주인 정무서 등이 송강 정철을 무소(誣疏)하여 추삭(追 削) 할 것을 청해 화(禍)를 헤아릴 수 없게 되자 공이 분연히 일어 나일도(一道)의사림을일으켜상소,윤허하여신설(伸雪·신원) 하니간당이자취를감추었다.이사실은조선시대여러사람들이 쓴 야사와 잡록을 모아놓은 대표적인 전집 대동야승(大東野乘) (기축록속 己丑錄續)편에기록되어 전해진다.공의 후손들은 남 성동문중이라하여세계를이어어고있다. 성균생원 논의 아우 린(隣, 사형의 차남)은 백씨 논과 더불어 학문이 뛰어났다.아들 재화·재경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재욱(再 郁)은 후사가 없어 아우 재경의 장자 규동(奎東)을 취했는데 그 의 호는 관매당(觀梅堂)으로 현손 원명(源明)은 몸가짐이 단정 하고효행이남달랐다.고종을유(乙酉,1885)진사시에합격하고 경인(庚寅, 1890)에 가감역(假監役)을 하고 그해 겨울에 효창원 (孝昌園,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원)수봉관(守奉官,종9품 참 봉)으로옳겼다.신묘(辛卯,1891)에사헌부감찰이되고,임진(壬 辰,1892)에보령군수를제수받아만경,용안을거쳐동복현감재 임때동학농민운동이일어나고부(古阜,현정읍)가더욱심하여 도탄에 빠지고 비적(匪賊)에 시달려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조정에서공의역량을믿고이고을을특명하니곧도착하여떼를 지어다니며약탈과살인을일삼는무리를잘알아듣도록타이르 는 한편 방(榜)을붙여백성을 불러들여 덕(德)으로 다스리고 어 루만지니마침내소요가가라앉고고을이진정되었다.이는당시 의상황을짐작해볼만하다.성난민심을무력으로만다스리는데 서 더 큰 화를 자초했다.그럼에도 공은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 고유화책으로서민심을수습한것이다. 경자(庚子,1900)에 비서승으로 특별히 승차된 후 다시 영암과 담양군수로 나아가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가선대부 중추원 의관을 특명 받았다.아들 봉주(鳳柱)가 자헌대부 장예원경에 오 르는등귀하게됨으로서자헌대부규장각제학에증직되었다. 고부군수(휘 원명)의 증손 현주(炫柱)는 광주 제일고, 고려대 경영학과,연세대경영대학원고위경영자과정수료,하버드대학 교 경영대학원 AMP과정을 수료하고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 과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하고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해 미래에셋을투자전문금융그룹인미래에셋금융그룹으로성장시 켰다.현재미래에셋증권회장,미래에셋증권홍콩회장으로지난 3일2024국제경영학회(AIB)에서아시아금융인최초로‘올해의 국제최고경영자상’을수상했다. 관매당공(휘 규동)의 현손 원규(淙奎)의 호는 금파(錦坡), 통 정대부에 오르고 이어 종2품 가선대부 중추원 봉상시 부제조를 지냈다.그의 아들 경주(京柱)는 아버지로 인해 부귀(富貴)한 집 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려서부터 베풀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사 람을구휼하고친구를좋아하여많은사람들이래왕하였다.특히 소작인에게 많은 특혜를 줌으로서 소작인들이 영세불망비를 마 을입구에세웠으며,기미만세운동에가담하여마침내광주운동 에 주동이 되어 여러 해 옥고를 치렀다.광복 후에 국민훈장 애족 장이 추서되었다.휘 린(隣,생원공 론의 아우)의 차남 재경의 후 손들은용두문중으로세계를잇는다.그는궁핍한생활에도독서 를게을리하지않았으며효우가뛰어났다. 봉사공(휘 선,좌랑공 희수의 아들)의 차남 진( 塋 )의 호(號)는 매헌(梅軒)으로가학을익혔다. 문간공의 셋째 민고(敏古)는 형 민중과 함께 문행이 뛰어났다. 이에 유일(遺逸)로 감역(監役)에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슬 하에 아들이 없고 따님 네분이 있는데 사위 또한 명문가이다. 첫 째는 경주인 이호문이고, 둘째는 홍주인 송제민, 셋째는 제주인 앙산욱,넷째는 장흥인 고경리이다.이중 둘째 송재민과,넷째 고 경리는 임란에 큰 공을 세워 가문 을 빛냈다. 육봉공의 휘는 우(祐), 자는 창 방(昌邦),육봉(六峯)은아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백씨 하 촌공에게서 글을 배워 당대의 명 공거물(名公巨物)의 대문장가가 되었다. 중종조에성균진사가되었는데 수석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학문 이 더욱 좋아지고 명성이 더욱 커 졌다. 또 15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교서관에 분속되었다가 이어 예문관 검열, 대교와 봉교를 거쳐 성균관 전적을 제수하였다. 성품이강직하여권세가들의미움 을 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 으며, 지방관을 지낼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포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공조, 병조정랑 등 주요 관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 우승 지,남원부사,도승지,성균관대사성,병조,이조참의한성부좌윤 겸동지춘추관사를역임하고청백리에녹선되었으며,차암사암 박순으로 인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에 빛났 으나 시문이 산일(散逸)되어 중형(문간공)의 눌재집 부록에 실 어졌다. 육봉공은 아들 둘(휘 개, 순)을 두었는데 장남 휘 개(漑)의 호 (號)는 연파(烟波)이다.향시(鄕試)에 두 군데를 보아 모두 장원 하여 성시(省試, 향시에서 선발된 이들을 예부에서 시험하는 제 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 선비가 엎어져 짓밟혀 죽었다.이를 보고 말하기를 “선비가 하나의 명예를 두고 다투느라 사람을 죽 이고도 돌아볼 여가가 없는데 이르니 이는 인인(仁人) 열사(烈 士)가 나가는 곳이아니다.”라고 말하고 뒤돌아 돌아와 이때부터 과거를 사절하고 나주 고향에 복거(卜居)하여 강호(江湖)에 거 쳐하면서낚시질로스스로즐거움을삼아일찍이시일절을짓고 읊으니 「배를 꾸며 흰 달 실으니/ 값을 따지면 황금도 헐 값이구 나/벼슬 나루에 매지 말거라/한 평생 푸른 바다 마음이라」라고 하니이시가굴러구중궁궐에들어가게되어선조임금이특별이 어사에게명하여그가숨어사는곳을엿보니거문고와책이방에 가득하고정자는강을눌러있는데노쇠한얼굴에백발을하고그 틈에쓰러져평상에엎드리고기대고하며바람을향해길게읊조 리다가 별안간 아이 종을 불러 배를 젓게 하고 여울을 내려가 안 개 낀 물결을 오르내리며 해가 기울어도 돌아 갈 줄을 모르는 것 이었다.어사가본대로복명하니임금이말하기를탄식하고은명 (恩命)이여러차례내렸으나끝내나가지아니하여하루는동생 사암공이일찍이경연에들어가니임금이말하기를“장주재소월 (裝舟載素月,배를 꾸며 흰 달 실으니)의 시(詩)는 처사(處士)의 시가아니오.경이나를위하여나오도록권할수있겠오.”하였다. 그 다음날 특명으로 한성참군을 제수하여 부득이 취임하여 잠깐 있다가현감에옮겼으며통정대부에가자되었다. 육봉공의 차남 휘 순(淳)은 조선중기의 문인 학자로 명종 8년 (1553)에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예문관전적을 시작으로 영의정 을15년간역임하며약35년간조정에있었다. 선생의 휘는 순(淳)이고, 자(字)는 화숙(和叔)으로 어릴적 호 는청하자(靑霞子)이고후에사암(思庵)으로바꿨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6세에 어머님이 돌 아가셔서 광주의 서모(庶母)집에 가서 의탁하였는데 여러 아이 들과 놀이를 하게 되면 으레 읍양(揖讓) 진퇴(進退)하는 절차를 하고는하였다. 1540년까지 아버지에게서 가학을 전습하였고, 1541년 서경덕 (徐敬德,1489년~1546년)의 문인으로 들어가 수학하였다.18세에 진사시에합격하면서명성이대단해졌다. 명종8년(1553)에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래 관도(官途)에 올라 선 조5년(1572)부터전후14년동안이나정승(政丞)을지낸우리역 사에서잊을수없는대재상(大宰相)이다. 사암선생은 숙부 눌재공(訥齋公)에서 친부(親父) 육봉공(六 峯公)으로 이어지는 강직 근엄한 가풍(家風)을 계승하고 눌재 (訥齋) 선생이 선도(先導) 함양(涵養)한 사류(士類)의 불퇴전 (不退轉)의 정신(精神)을 복응(服膺)하여 평생을 절조(節操)있 고정대(正大)하게살아가는일대(一代)의사표(師表)가되기에 부끄러움이없었다. 선조는 사암선생의 인품을 「松筠節操 水月精神, 송균절조 수 월정신」이라고까지극찬하였다.소나무와대나무의곧은절조에 맑은물과밝은달같은깨끗한정신의소유자라는뜻이었으리라. 한신하에게바치는찬사로는대단한내용이다.그만큼지절이높 았고깨끗한마음의소유자였다는뜻이었다.희대의정치가백사 이항복은사암의시장(諡狀)에서“옛말에어진사람은반드시용 기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공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하여 위대한그의용기를찬양했다. 명종 말년에외척(外戚)으로 영상의자리에 있으면서 횡포(橫 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윤원형을 사암선생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장문의장계(狀啓)를올려탄핵하였고,그일이발단이 되어윤원형은마침내권좌(權座)에서밀려나가기에이르렀다. 1586년 8월에 청가하여 35년의 관직을 마감하고 영평(永平,현 경기도포천)에은퇴하였는데,임금께서내사(內使)를보내동문 (東門)밖에서 술을 내렸다.영평에는 백운산이 있어 계담(溪潭) 이절승(絶勝)하였다.선생은 그길로 자리잡아 집을 짓고 거기에 서 사니 산뜻하니 진속(塵俗)을 벗어나 입에서는 시사(時事)를 끊고 매일같이 산골 백성과 전야(田野)의 늙은이들과 함께 자리 를다투며모든것을잊어버리고친밀히사귀었다. 배우려오는자가있으면서로토론하며즐거워하고지칠줄을 몰랐으며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 다. 임금은 선생의 건강을 챙기며 의원을 보내고 출사(出仕) 할 것을세차례나소망하였으나끝내나가지않았다. 1589년 7월 21일 일찍 일어나 시를 읊조리다 홀연히 세상을 떠 나니 춘추는 67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朝政)을 3일 동안 폐하고 승지가 조의를 전달하고 예관(禮官)이 제사(祭祀)를 드 리도록 명했다. 그해 10월에 례(禮)를 갖춰 종현산(鍾賢山, 경기 도포천시창수면주원리)동쪽지맥에갑향(甲向)으로안장되었 다.부인고씨와의사이에딸하나를낳았는데군수(郡守)이희간 (李希幹)에게 출가하였다. 이희간(李希幹) 군수의 후손이 300여 년 간 외손봉사하다 철종 때 어명으로 문간공의 후손 이휴( 視 休, 1806~1875)로 하여금 봉사손이 되게 하고 돈영부 부정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선생 사후 거의 60년이 지난 인조 24년(1646)에 이르러서야 비 로소 외손(外孫)들이 산재(散在)해 있는 유문(遺文)을 수합(收 合)하여 사암집(思庵集)의 초인본(初印本)을 간행 하였고,그후 중간을보아부록의문집이다소간추가된사암집(思菴集)7권이 전해져오고있다.나주월정서원,광주월봉서원,송호영당,개성 화곡서원,경기 포천의 옥병서원,대전 돈파사,장수 화산사에 배 향 되었다. 仁祖朝에 문충(文忠)이라 사시(賜諡)하였으니 시법 (諡法)에 학문에 근면하고 글을 좋아함을 문(文)이라하고, 현인 (賢人)을추천하고충성을다함을충(忠)이라하였다. 충주박씨는 가전충효(家 傳忠孝), 세수돈목(世守敦 睦)의 가훈을 600여 년 간 지 켜오면서 도학 문장과 충효 절의를 숭상하며 대대로 명 현석학을 배출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판서공(判書公)의 아들 오 형제중 장남(휘 인흥) 셋째 (휘 예흥)는 이북지역에, 다 섯째(휘 인흥)은 소재가 불 분명하고 현재 종중의 구성 원은 둘째 휘 의흥(참의공 파), 넷째 휘 지흥(찬성공파) 의후예들이대전광주전남지역에큰집성촌을이루며각종행사 에두루참석우의를다지고있다. 둘째참의공(휘의흥)은대전문지동등지역에지금까지산재 하며선영을지키고있다. 넷째 찬성공(휘 지흥)은 충청도에서 전남 광산군 서창면 사동 (寺洞,현광주광역시서구서창동)으로은거했던것은세조가어 린조카의왕위를찬탈하는정치적인혼란속에절의를지키며지 식인으로서양심을버리지않았다. 찬성공이 충청도 회덕에서 전라도 광주로 이거하여 득남하는 과정의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를 피해 은거할 곳을 찾아 남으로 향하던중전남장성입암산갈재에이르러날이어두워지자산막 에 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내가 너 의살 곳을 일러줄터이니 지금 밖에 있는 나의 쌍마를 타고 가다 가 그 쌍마가 멈추는 곳이 너의 살 곳이니라. 그 곳에 쌍마 중 한 마 리를매어표를해두고오너라.”하였다.그쌍마멈춘곳이방마산 이백마산으로바뀌었다고한다. 찬성공의아들하촌공과문간공의후예들은광주시서창동(절 골)과 송정지역에 큰 집성촌을 이룬다.절골에 주로 세거하는 후 손은휘현동(顯東)의후예이다.호가석은(石隱)인공은부인의 령남씨, 경주정씨, 광산김씨 등 세부인과의 사이에 후·심·엽·열· 당·훈등6형제를두었는데장남후는백형민동에게차남심은동 생성동의후사를잇게하는등크게번성하여지금의절골문중을 형성한다. 문간공의 6대손 생원공 론은 송정지역의 남성문중, 그의 조카 재경은 용두문중으로 세계를 이으면서 송정지역의 토반으로 세 계를잇고있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문간공신도비,절골마을입구 문간공재사봉서재,절골마을 눌재박상尊影 육봉공파(六峯公派) 문충공사암박순尊影 집성촌 충주박씨의세거지를알리는표석, 광주 서창동절골마을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