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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6월30일 일요일 7 (제210호) 기 획 경기도 고양시 장흥면 호국로 117-18(일영리 산 7 3)에 소재하는 공간공 부조묘와 신도비, 묘소를 찾 았다.부조묘는본래4대가넘는조상의신주는사당 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 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 지위(不遷之位)가된다.따라서불천지위가된대상 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부조 묘는중국의한나라때부터시작되었으며,우리나라 에서 부조묘가 등장한 것은 고려 중엽 이후 사당을 짓게되면서부터이다. 불천위가 된 신주는 처음에 묘 밑에 설치할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종가 근처에 사당을 지어둘 수 있게 됨으로써 부조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밀양 박씨 규정공 후에의 부조묘는 청재공(휘 심문,경기 도 안성시 대덕면 대농리),공효공(휘 중손,충북 청 원군 옥산면 신촌리), 공간공(휘 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충정공(휘 숭원, 충북 청원군 강내 면월탄리)등4곳이다. 공간공의 공의 휘는 건(楗)으로 자는 자계(子啓) 이고 호는 연봉(蓮峰)이다.존성재 미(楣)의 아우로 공효공(恭孝公)의 막내아들이다. 공은 1434년(세종 16·갑인) 12월 1일에 태어나 1453년(단종 원년·계 유)9월 26일에 중형(仲兄)박미(朴楣)와 함께 사마 관시(司馬館試)에 동반(同伴) 합격하니 이때 단종 임금마저박문의경사라며칭찬하여왕조실록(王朝 實錄)에 적고 있다. 이 시절 공의 아버지 공효공은 도 승지(都承旨)벼슬에계시었다. 공의 배위는 전주(全州) 최씨(崔氏)로 부평부사 (富平府使)최윤(崔昀)의따님이다.공은9월 에사마양시에합격하고는두달도아니된11월1일 식년시(式年試)문과에급제하니이때공의나이19 세의앳된나이였다. 공의 벼슬은 날로 올라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 이 되고 영주십팔학사(瀛州十八學士)에 들었다 성 균관직강(直講) 이조정랑(吏曹正郞), 예문관 응교 성균관 사예를 거쳐 의정부 검상을 지냈다. 1455년 (세조 1)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고 사 인, 예문관 직제학, 첨지중추부사, 승정원 우부승지 를 거쳐 1468년(예종 즉위)에 전라(全羅)감사로 나 갔으며강원(江原),경상(慶尙),평안관찰사(平安觀 察使), 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으며 1472년(성종 3)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477년 (성종8)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병조예조 공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한성판윤 1495(연산군 원 년)에호조판서형조판서를역임하고의정부좌우참 찬(議政府左右參贊),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가 1 504(연산 10)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좌 천(左遷)되었다.1506년9월에판중추부사로중종반 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익대정국훈(翊戴靖國勳) 으로밀원군에겉봉되었다가밀원부원군(密原府院 君)에 좌찬성(左贊成)겸 영경연사(領經筵事)가 되 었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승환(承煥)이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냈고 둘째 승수(承燧)는 병조참지(兵曺參知)를지냈으며셋째승약(承 845;)은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내고 조졸(早卒)하 였으며사위신용개(申用漑)는좌의정을지냈다. 1509년(중종4·기사)윤구월5일에하세하니향년 76세였다.임금이 부음(訃音)을듣고 애도하여 조회 를 쉬고 시호(諡號)를 공간(恭簡)이라 하고 부조지 전을내렸다.공의묘소는경기도양주시(楊州市)장 흥면(長興面)일영리(日迎里)절골에모셔져있다. 경기도 고양시 수여이길 60-37(성사동 563-2)의 청재공 묘와 재실이 있는 곳이다. 청재공은 사육신 에버금가는충절신으로불천지위를받았다. 공의 휘는 심문(審問)으로 자는 신숙(愼叔)이요 호는 청재(淸齋)다. 공은 1408년(태종 8·무자)에 나 산경수(蘿山耕 쑴 ) 부제학공(副提學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음직(蔭職)으로 인수부승(仁壽府丞)을 거 쳐 사온직장(司溫直長)이 되었다가 1435년(세종 18 ·병진) 4월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 曹正郞)을 역임하고 1437년(세종 19·정사) 사헌부 (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김종서(金宗瑞) 가불러그의종사관(從事官)이되어북방육진개척 에 종사하였다.배위는 청주(淸州)한씨(韓氏)로 부 사(副使)한승순(韓承舜)의따님이다. 공이 하세(下世)한 후 1804년(순조 4·갑자)에 “충 정고절(忠貞高節) 불하육신(不下六臣)”이란 글을 내렸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1828 년(순조 28·무자)에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에 단종(端宗)과사육신(死六臣)들과함께배향(配享) 되고 1856년(철종 7·병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 다. 1871년(고종 8·신미)에 충정(忠貞) 븮사군진절 왈 충(事君盡節 曰 忠)이요 청백자수 왈 정(靑白字守 曰貞)븯이란시호(諡號)를내렸다.1904년(광무8·갑 진)에 부조지전이 내렸다.공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성사리(星沙里)수억동(水億洞)정좌(丁坐)다. 청재공파(淸齋公派)의파조(派祖)다. 선곡공의 묘는 경기도 일산동구 진밭로70번길 27 1(문봉동 255-1)에 있다. 공의 휘는 안현(顔賢)이요 자는 기백(畿伯)이며 호가 선곡(仙谷)이다. 1574년 (선조 7·갑술)에 부정(副正) 신원공(愼元公)의 아 들로 태어나니 빈( 섹 )의 손자요 밀성군 광영(光榮) 의 증손이다. 외조는 전주인(全州人) 수(守·종친부 에 있던 관직명) 건(建)이고 처부(妻父)는 여흥인 (驪興人)민여경(閔汝慶)이다. 1601(선조 34) 신축(辛丑)에 아우 증현(曾賢)과 나란히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2년 후 계묘식 년(癸卯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 第)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거쳐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성천부사 (成川府使)를 지냈다 1616년(광해 8·병진)에 43세 의 젊은 나이에 졸하니,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문봉 동(文峰洞)에 장사 모시었다. 원종훈공(原從勳功) 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 다.선곡공파(仙谷公派)의파조(派祖)다. 공효공의 묘소와 재실중추재(仲樞齋) 는 경기도 파주시 탄 현면 오금리 94에 있 다. 공효공 또한 불천 지위를 받았다. 휘 (諱)는 중손(仲孫), 자(字)는 경윤(慶 胤), 호(號)는 묵재 (默齋)또는 백당(栢 堂)으로 시호는 공 (公)의 부음(訃音)을 접한 세조임금이 경 순사상왈 공(敬順事 上曰 恭)이요 자혜애친왈 효(慈惠愛親曰 孝)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부조지전을 내려 청주시 옥산면 (玉山面) 신촌(新村)마을에 부조묘가 있다. 1412년 (태종12.임진)정월(正月)에태어나1426년(세종8. 병오)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해 가을에 배위(配位)를 맞이하니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공 조정랑(工曹正郞)승조(承祚)의따님이다. 공께서는 1435년(세종 17. 을묘) 4월 7일에 문과 (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集賢殿 博士)에 제 수되어 벼슬에 올라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 서운판관(書雲判官븡관상감)으로 발탁되어 장영실(蔣英實)을독려하여경복궁뜰에혼천의(渾 天儀)를 간직한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발명 제작하게 하였다. 세종 대왕의특명이기도하였다.세종,문종,단종,세조등 네분의임금과도승지와공(工),이(吏),형(刑),예조 (禮曹)의사조(四曹)판서와의정부좌참찬,한성부 부윤,사헌부대사헌등요직을두루거친공께서는1 466년(세조 12. 병술) 5월 26일에 하세(下世)하시니 향년(享年)55세이셨다. 공효공은 계유정란에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에 오르고 인하여 전지 200결(結), 노비 25명, 안구마 1 필,백은 50냥 그리고 표리 1단을 하사 받았다.이 시 절의전지(田地)200결(結)은백여만평(坪)이웃도 는넓은땅이었다. 공의묘소앞에는장명등(長命燈)이좌우로두개 가 세워져 있는데, 두 개다 고려시대의 양식이라 하 며 좌측의 석등(石燈)은 그 형상(形象)이 일월형각 (日月形刻)으로 조각되어 그 모양이 기이하고 이채 로워 2001년 10월에 정부 보물 제 1323호로 지정 보 호하고있다.생전에 서운판관(書雲判官)이되어관 상감을역임하였기때문이라는추정이다.공의묘하 5백여미터 동구밖에는 육척(六尺) 장신의 신도비 (神道碑 사진2)가 서있다. 공의 신도비문은 상낙백 (上洛白) 김수녕(金壽寧)이 글을 지었는데 뒷날에 동문선(東文選)에오른유명한비문이기도하다. 의열공의묘소는경기도연천군백학면두일리산 149-3에 있다. 의열공은 청재공의 후예로 경남 밀양 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 雷)를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한 일은 두고두고 회 자 되는 등 큰 공을 세운 무관이다.의열공의 소개는 ‘선조유기를 찾아서’에 소개하기로 하고 당시 조선 선조수정실록26권,선조25년9월1일정사9번째기 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박진이 경주를 수복 하다.’를인용해본다. 박진(朴晋)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앞서 패 하였다가다시군사를모집하여안강현(安康縣)에주 둔하다가밤에몰래군사를다시진격시켜성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성안으로발사하여진안 에떨어뜨렸다.적이그제도를몰랐으므로다투어구 경하면서서로밀고당기며만져보는중에조금있다 가포(砲)가 그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 고쇳조각이별처럼부서져나갔다.이에맞아넘어져 즉사한자가20여명이었는데,온진중이놀라고두려 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서생포(西生浦)로도망하였다.박진이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일이 알 려지자,가선 대부로 승진시켰다. 【비격진천뢰는 그 제 도가옛날에는없었는데,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 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震天雷)를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 사하면5백∼6백보를날아가떨어지는데,얼마있다가화약이 안에서폭발하므로 진을함락시키는데는가장좋은무기였으 나그뒤에는활용하는사람이없었다.】 숭의전은고려태조왕건의위패를봉안한곳으로 경기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아미리 7)에 있다. 숭의전을 소개하기 먼저 우리나라 전의 대한 기원을먼저고찰(考察)하여본다. 고서(古書)에 의하면 사당(祠堂)은 신주를 모신 집이요,묘(廟)는종묘(宗廟)의준말로조선조왕과 왕비의위패를모시는왕실의사당을말하며전(殿) 은 궁전·신당·불각 등의 뜻을 나타냄이나 여기에서 전(殿)이라함은왕의위패를모시어놓고위하는묘 우(廟宇)라생각하면될것이다.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이어 은(殷)나라의 기자 (箕子),서여(胥餘)는 주(周)나라가 망하자 동쪽 조 선에와서기자조선(箕子朝鮮)을세워기원전천여 년간을통치하다가멸망하였다.고구려(高句麗),통 일신라(統一新羅) 등 천여년을 지나 고려(高麗) 중 엽에 이르러 기자숭배사상(箕子崇拜思想)에 의하 여평양에있는기자묘(箕子墓)를찾아1105년(고려 숙종10)에 기자묘사(箕子廟祠)를 세웠고, 1325(고 려 충숙왕12)년에 전각(殿閣)을 세웠다. 그 후 조선 조에 이르러 1613(광해군5)년에 숭인전(崇仁殿)이 라사액(賜額)된것이우리나라의첫번째전(殿)이 생긴 것이다. 특히 고려말기에 기자릉이 생기고 기 자전이 건립된 것으로 보아 사대사상(事大思想)에 서 유래(由來)된 것이라 하겠다. 기자의 후손 우평 (友平)은 기(奇)씨의 조(祖), 우직(友直)은 한(韓) 씨의 조(祖), 우량(友諒)은 선우(鮮于)씨의 조(祖) 라고한다. 다음으로조선태조는1397(태조6)년에경기도연 천군미산면에고려태조왕건(王建)의묘(廟)를세 우고 1399(정종1)에는 고려 태조와 7왕의 제사를 지 냈으며, 1452(문종2)에 우리나라 두 번째의 이 묘 (廟)를 숭의전(崇義殿)이라 사액(賜額)하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제향(祭享)을 모시게 하였 다.세번째건립된전(殿)이우리의숭덕전(崇德殿) 이다. 이미 서기 6(신라 남해왕3)년부터 시조왕묘 (始祖王廟)에제사(祭祀)를올리었고서기487(신라 소지왕9)년에서부터는 나을신궁(奈乙神宮)을 세워 그곳에서제사(祭祀)를모시어왔다. 이로부터 천 여년을 지나 1429(세종11)년에 묘전 (廟殿)을 창건하여 나라에서 제향(祭享)을 드리어 내려왔다.1723(경종3)년에숭덕전(崇德殿)이라사 액(賜額)을 하였으며 이때부터 후손 중에서 전참봉 (殿參奉)을임명하고제향을올리게하였다. 조선의3대국전이숭인전,숭의전,숭덕전인것이 다. 숭의전에대해알아본다.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 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 의위패를모시는사당을건립하였는데이것이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 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 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 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고려8왕의위패를봉안하였다.이후1425년(세종 7)에이르러조선의종묘에는5왕(五王)을제사하는 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현종,문종,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 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 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 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 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 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 려;金就礪,조충;趙 ,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이 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정몽주;鄭夢周)등을배 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 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 지와노비를내렸다. 이후 후손(後孫)들은 대대로 숭의전의 전감(殿 監)또는참봉(參奉)을역임(歷任)하였다.숭의전은 조선시대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 (정조13),1868년(고종5),1908년(순종2)등총5차 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한국전쟁중에전소하였으며,이를1972년 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숭의 전(崇義殿,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 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 (移安廳,위패를잠시모셔두는곳),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 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 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 門),협문(夾門)3동,운조문(雲鳥門)등 6개의 문으 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 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 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 전군 읍지(麻田郡邑誌)에 의하면 1899년당시 숭의 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 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 다. 서울특별시본부와함께가는유적 탐방 서울본부는지난달28일부터29일까지 1박2일에걸쳐경기지역을찾았다.규정 공후공간공,청재공,선곡공,공효공,청 재공후 의열공유적과 숭의전을 찾아 선 조의 얼을 기리고 회원간 보학을 통해 친목을돈독히해이번유적탐방지를함 께가본다.(순서는탐방순) 서울본부유적탐방단이고려숭의전을찾아기념촬영을하고있다. 공간공(휘건)묘및부조묘 공간공부조묘 공간공신도비 청재공(휘심문) 선곡공(휘안현) 공효공(휘중손) 공효공 묘소의 장명등(보물 제 1 323호) 의열공(毅烈公)박진(朴晋)장군묘 숭의전(崇義殿) 숭의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