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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 • 근우회 창립 69 는 입장을 취했다. 1930년 12월 18일 에 열린 확대집행위원회에서도 농촌 여 성의 계몽운동, 즉 문맹퇴치운동에 주 력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 선에 반발하며 1931년 3월 근우회 신의 주지회가 해소론을 제기했다. 해소론이 등장하면서 경성지회를 비롯한 지회 활 동이 침체에 빠졌다. 여기에 점차 도를 더하는 경찰의 압박으로 활동이 어려워 졌다. 근우회 본부는 해소 논의를 위해 1931년 7월 전국대회 개최를 시도했으 나 실패했다. 이후 근우회는 소멸의 길 을 걸었다. 독자적인 여성운동 단체로서의 근우회 흔히 근우회를 신간회의 ‘자매단체’ 라고 부른다. 근우회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이와 같 은 프레임이 없었다. 해방 이후인 1962년 조선일보 가 개최한 퇴직 여기자 방담회(放談會)에서 근우회에 서 사회주의계로 활약했던 황신덕이 신간회의 자매 기관으로 근우회가 조직되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활동 당사자가 발화한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 체’라는 프레임이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하 지 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근우회는 단순히 신간회 창 립을 좇아 결성된 신간회의 자매단체가 아니라 조선 여성 해방을 목표로 내세운 독자적 여성 운동단체였 다. 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근우회 창립과 광주학생운동 지원 등  항일운동의 세 주역 박원희·김영순·조복금 홍보 포스터(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