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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 • 국채보상운동 69 이리하여 부녀층으로 대구를 비롯한 경북지역 각처 에서는 기생 · 주모 · 과부 · 빈곤층 등의 부녀자들이 적 극적으로 참여했다. 상인층은 도시의 상인단체와 영세한 기층상인까 지 참여하였다. 상인단체는 국채보상운동을 실제로 주도하였고, 기층상인은 대구의 경우 짚신장수와 콩 나물장수, 그리고 술과 떡을 파는 노파들이 의연에 참여하였다. 경북 성주에서는 부싯깃 장수 · 콩나물 장수 등이 참여하였고, 서울에서는 노동자 · 인력거 부 · 고용원 등이 의연에 참여하였다. 군인 · 순검(巡檢, 현재의 경찰) 등의 참여도 주목된 다. 중앙의 시위대나 지방의 진위대 장교를 비롯하 여 궁궐을 지키는 순검, 시종무관부의 사환들도 의 연에 참여하였다. 봉화에 주둔하고 있던 원주진위대 소속 위관 민긍호는 봉급을 의연하여 봉화군민의 의 연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또 의병이나 화적(火賊)까지 국채보상운동에 직 접 참여하거나 호의를 보였다. 1896년 김산의진과 1906년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의병장 벽도(碧濤 ) 양 제안은 민중들이 모인 가운데 연설회를 개최하였고, 청도 출신 의병장 최한룡은 격문을 발표한 뒤 창의 하였다. 심지어 영천 · 경주 등지에서는 화적들이 국 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양민들에 대한 침해를 중단하 고 자신들도 참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경북 고령군의 경우, 1907년 3월 13일 설립된 고 령군단연상채회는 서울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대구금연상채회의 지도를 받아 면 · 리의 자치기구를 조직화하고 의연금을 배분 · 할당하여 갹출(醵出)였 다. 이것은 전통적인 향약(鄕約)을 기반으로 하는 자 치조직을 이용한 것이었다. 고령군단연상채회는 향 교를 통해 면을 단 위로 총대와 임원을 배치하고, 각 마을의 세금 납부의 의무가 있는 정남을 대상으로 의연금을 할당 · 배분하였다. 경북 경주와 상주의 경 우에도 의연금 수집 상황은 대체로 비슷하였다. 통감부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의 보고서 「국채보상모집금의 건」(1907.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