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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 최세윤 · 정원집 · 김영백 의병장 69 장 조성관(趙聖寬), 군량관 변순오(卞順五), 포대장 김 경련(金京連), 도통장 최정근(崔正根) 등으로 지휘부 를 편성하였다. 그는 1천명의 의병과 총기 200정을 준비했다. 군자금과 무기와 탄약, 식량과 피복 등을 주민들로부터 거두어 들였다. 1천명 규모의 부하는 가장 많았을 때이며 신뢰할 만한 부하는 약 300명이 라고 알려졌다. 일제는 김영백 의병장이 이끄는 의 병부대의 규모를 100명 내외로 파악하였다. 이를 기반삼아 김영백 의병부대는 장성을 비롯 한 정읍 · 부안 · 고창 · 순창 등 전라남북도를 넘나들 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판결문에 의하면, 이들 은 1908년 음력 3월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을 시 작으로 1909년 6월까지 10여 차례 이상 일제 군경 과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 과 같다. 1908년 3월(음) 정읍 단곡리에서 일본군 수비 대의 기병을 기습하였고, 7월(음)에는 흥덕 법지(法止) 수 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음)에는 고창의 방 장산 백계동에서, 10월(음)에는 장성 북이면 신기리 에서, 11월(음)에는 장성 북이면 오현(鰲峴)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하였다. 또한, 1909년 1월(음)에는 북이 면 상곡리, 2월(음)에는 북일면 동산리와 흥덕 세곡 리, 4월(음)에는 흥덕 일동면 구수교(九水橋), 일남면 유점리 그리고 고부 강고리 등에서 각각 전투를 벌 였다. 이 과정에서 전해산과 박도경이 이끄는 의병 부대와 연합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09년 5월 이들은 정읍의 한 산중에서 총기를 제 조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발각되어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5명이 전사하고, 다량의 무기와 제 조 중인 총기 부품 등을 빼앗겼다. 일본인 농장주가 김영백이 강하게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된 을사5조약(을사늑약) 조약문 (1905.11,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독립기념관 제공). 제목도 비준 서명도 없 는 문서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당국은  몹시 서두르느라고 조약 제목도 붙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