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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 황진남 · 이의경(이미륵) · 김갑수 선생 69 다.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가한 배경은 각기 달랐 다. 김갑수는 월남 이상재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 동에 투신했다. 황진남은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를 만나고 그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보좌했던 인물이다. 이의경은 국내에서 경성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3 · 1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 에 쫓기게 되면서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들 은 유덕고려학우회를 조직한 이후 동지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했다. 독일 한인 유학생들의 리더 김갑수 김갑수(金甲洙, 1894∼1938)는 충남 서천군 한 산면 종지리에서 4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하 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월남 이상재(1850-1927) 의 생가와 마주한 곳이었다. 숙박업을 경영하며 많 은 재산을 쌓았던 김갑수의 부친 김영성은 이상재 와 친분이 두터웠다. 1903년 옥고를 치르며 기독교 를 받아들인 이상재가 1904년 고향에 교회를 세우 려 할 때, 김영성은 교회를 설립하는 자금을 대며 종 지리 교회를 세웠다. 김갑수는 13세 때인 1907년 이 상재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경신학교에 들어갔다. 경 신학교는 당시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와있던 언더우드가 1886년에 정동에 있 던 자기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 시작이었다. 1901년에는 종 로 연지동에 새로이 학교를 마련 하고 선교사인 J. S. 게일이 교장 으로 취임하여 학교명을 “깨우쳐 새로워진다”는 뜻의 이름인 ‘경 신학교’로 바꿨다. 김유순·김규 식·안창호·서병호 등이 이 학교에 서 신학문을 배웠다. 김갑수는 이상재의 집에서 기 숙하면서 YMCA 영어학교에서 192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의 발트하우스에서 함께한 독일유학생들(앞줄 오른쪽부 터 민범식, 이의경[이미륵], 맨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이극로, 한사람 건너 최근 우, 맨끝 이관용) 유덕한인학생회 사무실(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