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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경천 선생 69 시 백위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적군(赤軍) 사령 관은 불리하여 항복했으나, 김경 천은 수찬의병대와 적군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는데 성 공했다. 결국 1922년 3월 백위군 을 우수리스크로 쫓아냈다. 1922년 7월 김경천이 백위군 을 몰아내자 연해주지방의 러시 아혁명군사위원회는 그를 포시 에트 군사구역 조선부대 사령관 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 수하자 무장해제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에 1923년 2월 중국 상하이(上海) 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에 실망하여 4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희생돼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학 교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1936 년 9월 스탈린의 고려인 등 대숙청 시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으나, 다시 일방적인 ‘간첩혐의’로 소련의 북동쪽 끝 꼬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 의공화국으로 유배되어 주거제한과 강제노 동에 시달렸다. 결국 1942년 1월 2일 아르항 겔스코에주 금고지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 하고 말았다. 너무나 억울하게도 스탈린이 지 배하던 시기라 정확한 사망 경위나 장소도 자 세히 알 수 없다. 다행히 스탈린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모스크바 군관구(軍管區) 군법회의에서 재심리되어 같은 해 2월 19일 사후에 복권되었다.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 다. 김경천의 회고록인 『경천아일록』 의 앞부분(경향신문 제공)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할 당 시 김경천의 모습(연합뉴스 제공) 2015년 9월 서울시 종로구 김경천의 옛집 터에 설치된 ‘김경천 집터’ 표지판 (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