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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 김창환 · 이진산 · 윤덕보 · 김원식 선생 69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이후 많은 이 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주로 이동시켰으며,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1922년 만주와 노령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 동단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서로군정서(西路軍 政署), 대한독립단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 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大 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남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무장단체인 대한통의부(大 韓統義府)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통의부는 곧 간부들 사이의 이념과 인선, 조직상의 이견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 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해방 후 건설할 국가 상을 공화주의로 하느냐 복벽주의(復辟主義, 옛 왕조 로 돌아감)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중심으로 공화주의 계열은 통의부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으 나, 복벽주의 계열은 따로 의군부(義軍 府)를 조직하 여 결국 독립 하고 말았다. 통 의 부 가 의군부와 참 의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 에서 통의부 는 새로운 방 향을 모색해 야 만 했 다 . 통의부에서는 각 지역의 대의원 등을 소집해 남 만대 의원회(南滿代議員會)를 개최하고 10개 단체 대표 등 을 모아 회의를 거듭하였다. 결국 1924년 11월 독립 운동단체의 통합을 의결하고 단체의 명칭을 정의부 (正義府)라고 명명하였다. 정의부 기관지 『젼우』 제3호(1927.7.1, 박 환 제공) 정의부 선언서(1928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