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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2025년 2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2월의 독립운동 천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원산에 보내려 하자, 인천 지회가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이 연행 되어 구류 처분을 받았다. 전국 각지의 신간회 지회 들은 지회별로 동정금(同情金, 격려금을 말함)을 모 금하거나, 원산총파업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 고 격려 전보를 보내는 등 원산총파업을 지원하였 다. 원산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사회의식과 민족의식 을 크게 높인 노동운동이자 민족운동이었다. 1929년 6월 16일부터 19일 사이에, 일제 경찰이 삼림 보호를 빌미로 함경남도 갑산군 화전민 마을에 방화하고 화전민을 추방한 ‘갑산 화전민 사건’이 일 어났다. 이들 화전민은 작년 수재로 생계를 잃고 이 곳에 들어간 수재민이 대다수였다. 신간회 중앙본부 는 현장에 진상 조사 위원을 파견한 뒤, 7월 17일 ‘화 전민 충화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후 ‘갑 산 화전민 사건’ 대책을 발표하고, 실행에 옮겨 일정 한 성과를 내었다. 그 결과 총독부는 1929년도의 수 확을 보장하고 화전민을 백채동(白菜洞)으로 이주하 도록 허락하였다. 갑산 화전민의 항쟁은 신간회를 비롯해 각 방면의 조선인들이 광범위하게 연대한 항 일운동이었다.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광주학생운 동’이라 불리는 학생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신간회 중앙본부는 진상 조사를 위해 중앙집행위원장을 비 롯해 중요 간부들이 직접 광주로 향했고, 광주경찰 서장과 일본인 검사장 등에게 조선인 학생들만을 처 벌하는 처사를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총독부가 광주 학생운동과 관련한 보도를 일체 금지시켰으나, 신간 회 중앙본부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12월 13일 서울에서 ‘민중대회’를 계획하였다. 또 총 독부 등 일제 당국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각 지회와 신문사에 발송했고, 일부는 서울 조선극 장에 뿌렸다. 민중대회는 일제 경찰에게 사전에 탐 지되어 대회 당일 이른 아침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과 대회 준비자들이 검거되었다. 민중대회는 이렇게 좌절되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서울 시내 학생들이 궐기하기 시작하여 학생 시위운동이 전국으로 급속 하게 확산되었다. 신간회 지회를 중심으로 광주학생 운동을 전국 학생의 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킨 의의는 한국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929년은 원산총파업으로 시작하여 광주학생운 동으로 저물었고, 학생들의 항일 시위는 1930년 3월 까지 지속하였다. 1929년 1월부터 4개월 동안 원산 인구의 3분의 1이 참여한 원산총파업을 계기로 노동 운동이 확산되고, 학생독립운동이 지속하자 사회주 의자들은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고 판단하였 다. 이들은 1929년 미국에서 발단한 세계 대공황도 혁명을 조성하는 정세로 인식하였다. 민중대회 사건 으로 신간회의 중앙 간부들이 구속되고, 새로 들어 선 집행부는 강경한 투쟁보다는 온건한 합법 투쟁 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 회가 초기에 내세운 비타협주의를 포기하고, 식민지 체제 안에서 부분의 개량에 만족하는 ‘개량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세계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 다는 오판에 근거하여, 신간회 지도부가 세계 혁명 에 부응할 노동 · 농민 운동을 지도하지 못한다고 단 정하고 신간회의 ‘해소’(解消)를 주장하기 시작하였 다. 그리고 마침내 1931년 5월 16일 신간회 창립대 회 후 처음이자 마지막 전체 대회가 열렸다. 전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