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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1월의 독립운동가 참위(鄭參尉)라 불렸는데, 그가 해산군인 출신이었 기 때문이다. 그가 군사지식을 갖춘 해산군인이었으 므로 전해산 의병장은 선봉장의 중책을 맡겼을 것이 다. 실제로 정원집은 1908년 후반 나주 석문산과 영 광 불갑산 전투 등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해산의 대동창의단은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대 표적인 의진으로 손꼽혔다. 이들은 일제 군경과의 전투와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및 가짜 의병의 처단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일제 군경 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 다. 이에 전해산 의병장은 심남일(沈南一) 의병장과 함께 호남 각지의 여러 의병부대와 연락하여 호남동 의단(湖南同義團)을 결성하였다. 1908년 말 11개 의 진이 참여한 호남동의단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보 다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당시 전해산 의병장이 배포한 격문에서, “나는 정 원집과 더불어 수십여 진을 규합하여 산과 바다를 횡행”한다고 표방한 점만 보더라도 선봉장 정원집 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1월 하순 정원집은 나주 고막원에 있는 일본군 병참소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을 섬멸할 뿐만 아니라 다량의 무기 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 투 과정에서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라남북도를 오가며 유격전을 펼친 김영백 의병장 김영백(金永伯, 1880-1910, 일명 金佑)은 전라남 도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에 살았다. 의병을 일으키 기 전 그의 이력을 찾을 수 없고, 판결문에 그의 직 업이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다만 그가,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힘입어 정치를 행함은 그 독 립을 해치는 것으로 단정하고, 일본인 기타 여러 외 국인을 추방하고 정사를 변경하려는 목적”으로 의 병을 일으켰다고 밝힌 점이 주목된다. 이를 통해 그 가 일본이 1905년 11월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본인을 비롯한 외세를 내쫓기 위해 의 병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 결하여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그 것을 방조한 외국 세력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타도 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의 의병을 일으킨 배경과 목적을 보면 신념이 강한 우국지사였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음력 10월 그는 고향인 장성 북이면에서 1천명의 의병을 불러 모아 스스로 의병장에 올랐다. 그는 선봉장 국호남 · 허경화(麴湖南 · 許京化), 중군장 강정형 · 강의관(姜正珩 · 姜議官), 후군장 심학래(沈學 來), 좌익장 고복경(高卜京), 우익장 신성근(申聖根), 행군장 김일주(金一珠), 감독장 오순오(吳順五), 호군 김영백(김우) 의병장 초상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