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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2024년 8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압수를 피할 수 있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하면서 고무 격려하였 고, 한국인들은 베델의 신문을 열광적으로 지 지하였다. 고종(광무황제)도 베델을 지원하고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하였다. 『대한매일신 보』는 항일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본 부이자,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거두는 총합 소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 볼 때 베델은 한 국 침략에 큰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하거나 베델이 발행하는 신문 을 폐간시켜야 한다고 영국에 강력하고도 끈 질기게 요구하였다. 베델의 처리를 둘러싼 영·일 간의 외교교섭 은 1904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은 후인 1910 년에야 마무리되었다. 그 중간에 영국은 일본 의 요구와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베델을 두 번이나 재판에 회부하였다. 한국 땅 양화진에 잠든 항일 언론인 베델은 1909년 5월 1일 37살의 젊은 나이 로 갑자기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확장이었으 나, 그 전 해에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재판과 중 국 상하이(上海)에서의 금고형, 양기탁 재판 때의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받은 일 등 의 긴장이 겹쳐 건강을 크게 해친 것이 복합 적인 원인이었다. 베델의 죽음에 대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베델은 한국인들 이 슬퍼하는 가운데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뜻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 은 이듬해인 1910년 4월에 조용히 시작되었 다. 모금을 알리는 아무런 광고도 없었다. 그 런데 뜻밖에도 짧지만 정의로웠던 베델의 죽 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그 가 죽은 지 1년 뒤인 1910년 6월, 비석이 완 성되었다. 앞면에는 한자로 ‘대한매일신보 사 장 대영국인 베델의 묘’라 쓰고, 뒷면은 당대 의 논객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새긴 한국식 비석이었다. 1950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 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만사첩(베델 조문 기록)과 베델의 장례식 당시 모습(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