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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은 충청남도 예산 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3일 예산면(禮山面)에서 소규모 만세로 시작되었다. 서울 등지에서 학생들이 단결하여 크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주민 5명이 동쪽 산 위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었다. 이후 3월 9일 예산면 예산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예산헌병분대가 사전에 탐지하여 무산되었다. 3월 13일 오후 2시 대흥면(大興面) 동서리(東西里) 대흥공립보통학교 전교생 약 300명이 대흥시장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대흥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시위 주도 학생 3명을 체포하는 등 시위를 저지하여 학생들은 해산하였다.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 김동욱은 이러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용태는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3일 예산면(禮山面)에서 소규모 만세로 시작되었다. 서울 등지에서 학생들이 단결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주민 5명이 동쪽 산 위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었다. 이후 3월 9일 예산면 예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대흥면 장날인 3월 13일에는 오후 2시부터 대흥공립보통학교(大興公立普通學校) 전교생 300명이 대흥시장(大興市場)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대흥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동 학생 3명을 체포하는 등 시위를 저지하자 학생들은 해산하였다.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용태는 이러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소요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이기는 충청남도 예산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3일 예산면(禮山面)에서 소규모 만세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서울 등지에서 학생들이 단결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주민 5명이 동쪽 산 위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3월 9일 예산면 예산리(禮山里)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대흥면(大興面) 장날인 3월 13일에는 오후 2시부터 동서리(東西里) 대흥공립보통학교(大興公立普通學校) 전교생 300여 명이 대흥시장(大興市場)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대흥헌병주재소(大興憲兵駐在所) 헌병들이 출동하여 시위 주도 학생 3명을 체포하는 등 시위를 저지하고 나서야 군중이 해산되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이기는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 혐의를 받았고, 1919년 4월 2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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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복은 충청남도 예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3일 예산면(禮山面)에서 소규모 만세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학생들이 단결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주민 5명이 동쪽 산 위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3월 9일 예산면 예산리(禮山里)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했다. 대흥면(大興面) 장날인 3월 13일에는 오후 2시부터 대흥공립보통학교(大興公立普通學校) 전교생 300명이 대흥시장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대흥헌병주재소(大興憲兵駐在所)에서 헌병들이 출동하여 시위를 주도한 학생을 체포하는 등 만세운동을 저지했다.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 박동복은 이러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희주는 1919년 3월 13일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大興面) 동서리(東西里) 대흥시장(大興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예산에서 1919년 3월 3일 오후 11시 30분경 예산 읍내 동쪽 산 위에서 윤칠영(尹七榮) 등 5명이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를 큰소리로 연호했다. 3월 9일에는 예산 읍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예산헌병분대의 사전 탐지로 탄압받았다. 3월 13일 오후 2시 대흥면 동서리에서 대흥공립보통학교(大興公立普通學校)의 전교생 약 300명이 대흥시장으로 뛰어나가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고 시장을 행진했다. 이에 대흥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도 학생 3명을 체포하고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추가로 검거당한 학생들도 대흥주재소에서 예산헌병분대로 압송되어 신문조사를 받은 후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이희주는 이러한 대흥 3.1운동에 참가하여 대흥헌병주재소 헌병에게 체포되어 예산헌병분대로 압송되고 신문조사를 받은 후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옥섭은 1919년 3월 13일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大興面) 동서리(東西里) 대흥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1919년 3월 3일 오후 11시 30분경 예산 읍내 동쪽 산위에서 윤칠영(尹七榮)이 친구 4명과 함께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를 소리 높여 연호했다. 예산헌병분대 헌병들이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조사 후 훈방 조치했다. 3월 13일 하오 2시 대흥면(大興面) 동서리(東西里)에서 대흥공립보통학교(大興公立普通學校) 전교생 약 300명이 학교에서 대흥시장(大興市場)으로 나아가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장 일대를 행진했다. 이에 대흥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시위 주도자 3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이후 추가적으로 검거된 학생들은 예산헌병분대로 압송되었다. 이어서 ‘보안법 위반’을 적용하여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시켰다. 응봉의 정옥섭(丁玉燮)·이희주(李羲周)·김동욱(金東旭)·광시의 권병기(權炳譏)·대흥의 김용태(金容泰)·신양의 김이기(金利基)·박동복(朴同福) 등의 학생들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처럼 정옥섭은 대흥 지역 3.1운동에 참가하여 대흥헌병주재소 헌병에게 체포되어 예산헌병분대로 압송되고 신문조사를 받은 후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