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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2023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7월의 독립운동가 들 일손이 필요할 뿐 조선인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 독립이 멀지 않 았음을 알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발급받아 보내준 가짜 폐 병 진단서를 회사에 제출하여 유만수, 조문기보다 2년여 먼저 귀국하여 마음을 잡지 못하였다. 가슴 이 짓눌리는 강박에 시달리며 답답한 하루하루를 견디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현 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던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그가 살던 곳은 유만수의 관수동 집과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는데, 어느날 거리에서 우연 히 만난 일본강관주식회사의 동료 유만수의 권유 로 대한애국청년당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친일 거 두 3명, 조선총독부 인사 3명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제1순위로 거론된 인물은 박춘금이었다. 박춘금은 가난을 이기려고 일본으 로 건너가 탄광갱부, 노무자 등으로 전전하다 가 일 본의 폭력조직인 흑룡회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거물 폭력배로 성장한 인물이다. 특히 1920년 도쿄에서 일선융화(日鮮融和)를 표 방하면서 조직된 상구회(相救會)의 회장이 되었고, 상구회는 1921년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였다. 그 는 상애회 회장으로서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 하자 조선인 노무자 300명으로 노동봉사대를 결성 하고 시체 처리와 조선인 노무자 색출 및 수용 작 업에 종사하였고, 1928년에는 동아일보 사장 송진 우를 납치, 폭행하였다. 또한 1932년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전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 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각종 시국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노력했다. 특히 1945년 6월 대의당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 했다. 이에 대한청년애국당은 박춘금을 제1순위 처 과거 ‘부민관 폭파 의거 터’ 표지석(한국관광공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