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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순국선 열 독 립 항쟁사 67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3.1 운동은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 으나 결코 실패한 투쟁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국내외에 알 렸으며 전 세계 민족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일제의 폭력적인 통치방식을 바꾸어놓았다. 다 함께 힘을 모을 때 독립이 실현될 수 있음을 깨 닫게 됨에 따라 항일 투쟁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리고 이러한 항일 투쟁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 과적으로 이끌 중추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9년 2월 연해주에서 한인들이 대한 국민 의 회를 조직하였다. 대한 국민 의회는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로 우리 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일제의 통치 철폐를 강조하였다. 4월이 되자 서울과 중국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서울에서는 종교계 대표를 중심으 로 임시정부(한성 정부)를 조직하였다.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선포문,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및 6개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2 호를 발표하였다. 한성 정부는 연합통신(UP)에도 보도되어 국제적인 선포 효과를 얻었다. 상하이에 서는 출신 지역별로 뽑은 대표자들이 모여 임시 헌장(헌법)을 제정하고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어 임 시 의정원(국회)과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단일 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가 진행되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두는 것이 보다 안전하고 외교활동에 유리하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이전에 조직된 한성 정부와 대한 조국 광복 위한 큰 터전을 마련하다 5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