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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 • 근우회 창립 67 를 지원했다. 1929년 7월에는 임산부 가 경찰에 체포되는 도중에 낙태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에 나섰다. 1930년에는 개벽사가 발행하는 『별건 곤』 2월호가 근우회를 중상 모략한 기 사를 싣자 이에 반발하며 비매(非買) 동맹의 결성을 추진했다. 한편 근우회는 1929년 5월 기관지 인 『근우』를 창간했다. 하지만 창간호 에 이은 제2호 원고 모두가 조선총독 부 경무국에 압수되면서 기관지 발간 은 중단되었다. ② 근우회 운영의 변화 근우회는 창립 1년 만인 1928년 7 월 14일에 경성 천도교 기념관에서 임시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임 시 전국대회가 끝난 직후 사회주의계 와 기독교계 여성운동가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이 임시 전국대회에서는 중 앙집행위원장과 23명의 중앙집행위 원이 선출되었다. 7월 23일에는 중앙 상무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주요 보 직 대부분을 사회주의자들이 차지했 다. 이에 많은 기독교계 여성운동가 들이 근우회를 탈퇴했다. 그런데 기독교계 간부의 탈퇴는 사회주의계와의 갈등 때문만이 아니라, 기 독교계 사회운동의 방향 전환과도 연관이 있었다. 1928년에 YWCA, YMCA, 장로교, 감리교, 조선예 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연합해 농촌사업협동위원회 를 설치했다. YWCA도 홍은경을 위원으로 하는 농 촌부를 설치했다. 이처럼 기독교계 여성운동가들이 탈퇴하면서 근 우회에서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의 주도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하지만 근우회가 사실상 ‘해소’될 때까 숙명여고보의 동맹휴학 사건을 보도한 기 사 「교원이 분로(分路)하야 학부형 개별방 문, 해결될 희망은 아즉도 묘연」(『동아일보』 1927.6.12) 『근우』제1권 1호 표지(1929.5) (현담문고 제공) 1928년 7월 16일 게최된 근우회 전국대회 광경(독립기념관 제공). 일제 경찰 의 집회 금지로 임시대회 형식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