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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 • 국채보상운동 67 두 단체는 국채보상운동의 큰 축을 형성했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단체의 조직과 참여는 자발적 이고 열성적이었다.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와 국채보상중앙의무사가 취지서를 발표한 뒤, 각지에 서 국채보상기성회·단연회·국채보상의성회·국채보 상의무회·국채보상동맹·국채보상회·단연동맹회·국 채보상혈맹회 등의 이름으로 단체들이 조직되어 의 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국채보상운동 단체는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주도 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2월 21일 북 후정 민중대회가 개최된 뒤, 대구 남일동에서는 2월 23일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조직되어 취지서를 발표하는 등 그 반응이 대단했다. 우선 대구금연상 채회의 대구국채보상사무소는 각 부와 각 군에 취 지문을 돌려 보상금을 기부하도록 격려했고, 보상 금의 수집 방법으로 각 도 · 군이 규정을 만들도록 권 장했다. 경상북도에서도 대구금연상채회가 각 지역으로 취지문을 돌리면서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 되기 시작했다. 1907년 3월 13일 고령군단연상채회가 설 립된 이후, 3월부터 5월에 걸쳐 각 군에서 국채보상 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즉 고령군단연상채회를 시 작으로 3월에는 성주·선산·김천, 4월에는 청도·상주· 경산·예천·문경, 5월에는 현풍·용궁 등지에서 국채보 상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경상남도 동래는 처음 국채보상에 대한 논의가 있 었던 곳이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발기되자, 이에 호응하여 1907년 3월 초 동래부 국채보상일심 회, 4월 중순 부상항 좌천리 감선의연부인회와 5월 초 좌천리 단연동맹회가 결성되었다. 1907년 3월 말 경 창원 · 마산항 국채보상의연소, 1907년 6월 김해 군 명지면 국채보상동맹회 등을 비롯하여 진주 · 밀 양 · 하동 · 의령 · 진남 · 단성 · 안의 등지에서도 국채보상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경기도에서는 일찍이 인천항 신상회사의 단연동 맹회가 설립된 이후, 1907년 2월 말 통진군 사립 분 『대한매일신보』(1907.3.8)에 실린 논설 「국채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