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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 최세윤 · 정원집 · 김영백 의병장 67 년에는 독립의군부에 가담했을 뿐 만 아니라 이후에도 일사보국(一死 報國)의 신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 한 우국지사였다. 정원집과 이봉래 역시 1908년 후반 10년 유배형 중이던 현재의 신안군 지도를 탈출하여 다시 의 병에 투신하였다. 이들은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 쟁을 벌이던 전해산(全海山) 의병 부대에 들어가 정원집은 선봉장으 로, 이봉래는 종사(從事)로 활동하 였다. 전해산의 본명은 기홍(基泓),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 이었다. 그는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07년 음력 9월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석용(李錫庸) 의 진에 참여하였다. 1908년 봄 그는 전라남도에서 명성이 자자한 김태 원 의진에 가담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김태원 의병장은 어등산에서 전사한 직후였다. 허탈한 심정의 전해산은 김태원 의진에서 활동한 조경환 · 오성술 등 을 만나 심기일전하였다. 1908년 중반 그는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 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었다. 이때 정원 집과 이봉래는 유배지를 탈출하여 대동창의단의 선 봉장과 종사로 각각 참여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나 주 · 영광 · 함평 · 고창 등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항일투 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전해산은 바다와 산을 누비 며 의병항쟁을 펼치겠다는 의미로 ‘해산’이라는 이 명을 만들어서 본명보다는 전해산으로 널리 알려졌 다. 대동창의단의 선봉장으로 활약한 정원집은 정 정원집이 가담해서 투쟁했던 정철화 · 방인관 의병부대 활동 관련 정철화의 판결 문(1908.5.29, 이상 국가기록원 제공) 정원집 · 이봉래의 의병활동에 대한 대한제국 평리원의 판결문(1907.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