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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 • 안춘생 · 조순옥 · 박영준 · 신순호 선생 67 터 한국인 병사들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에 참여하던 박영준은 한국광복군 창설 후 합류하게 되었다. 1940년 9월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좌우익 계열의 무장조직을 포괄하며 1942년 대대적으로 개편되었 다. 이에 따라 기존 제1지대와 제5지대는 제2지대 로 재편성되었으며, 총사령부 구성원도 대폭 보강 되었다. 박영준은 1942년 4월부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군무 행정을 담당하였다. 한국독 립당 당원이었던 그는 임시정부 수호에 앞장서며 임 시정부와 광복군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1943년 6월 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이 되었으 며, 같은 해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에 임 명되었다. 그리고 1943년 12월 12일 박영준은 우스 예샹(吳師爺巷) 임시정부 청사 대례당에서 신건식의 딸 신순호와 결혼하였다. 이때 박찬익은 “가정을 갖 고 자식 다섯을 두었지만, 자식 결혼식에 참석하기 는 오늘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됩니다”라며 벅찬 소 회를 밝혔다. 이미 청년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박영준과 신순호는 이후 함께 독립운동 대열 에 서며 공동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5년 3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이 된 박영준은 적진 깊숙한 곳곳에서 선전 · 정보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인 병사들을 모집하며 활약하였 다. 중국 관내(關內) 요충지인 카이펑지구(開封地區) 에서 광복을 맞이한 그는 포로가 된 한인 병사들을 석방시켜 광복군 잠편지대에 배속시키는 임무를 수 행했다. 1945년 8월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 대 부분이 국내로 귀국했지만, 그의 가족은 중국에 남 아 임시정부의 전후 외교를 도맡게 되었다. 박찬익 이 주화(駐華)대표단의 대표로서 대중국 외교를 계속 담당하게 된 것이다. 주화대표단은 중국과의 외교는 물론 중국내 한인들의 안전과 보호를 담당하는 역할 을 이어갔다. 주화대표단은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 주하는 중국 동북지역에 총판사처를 설치한 후 난징 (南京)에 본부를 두었다. 주화대표단을 이끌던 부친 과 함께 선무(宣撫) 활동을 담당하던 그는 1949년 4 신건식-오건해, 신순호 가족(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 45권) 한국주화대표단 일동. 앞줄 가운데 박찬익, 그 오른쪽이 부친 신 건식, 2열 4번째가 신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