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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선생 67 선 한국민의 저항을 알림으로써 국제여론이 일본에 불리하도록 유도했다. 국내 정치상황 에서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신문의 항일논조 로 한국 내에서 항일 민족운동을 크게 고취하 였다. 언론을 통해 항일의 목소리를 높인 영국인 대한제국기(한말) 최대의 민족지 『대한매 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발행한 영국인 베델 (裴說)은 한영수호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 후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에게 깊은 신뢰와 존 경을 받은 영국인이다. 베델은 영국·한국·일본 세 나라와 관련 이 있는 인물이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지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 뎠으나. 곧 서울에서 신문을 창간하여 강력한 항일논조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젊 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베델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 하던 위급한 시기에 신문을 발행했다. 1904 년의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침략의 야 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은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乙巳勒約, 일명 을 사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서울에 한국 통감부를 설치하고 거물 정치인 이토 히로부 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으로 부임하여 한국 의 내정에 직접 간여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은 독립 국가였지만, 실상은 일본의 통치를 받는 처지였다. 주한 일본 헌병대는 모든 신 문을 발행 이전에 검열하여 반일 언론을 억 압하였다. 베델은 이러한 상황에서 3개의 신문을 발 행하였다. ①국한문 『대한매일신보』, ②순한 글 『대한매일신보』, ③영어신문 『코리아 데일 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가 그것이 다. 하나의 신문사에서 3개의 신문을 동시에 발행한 사람은 베델이 처음이었다. 그의 신문 은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침략을 격렬하 게 규탄하였다. 일본군은 한국 언론을 철저히 탄압했지만, 베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해서 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 델의 신문은 한국통감부가 자행하는 검열과 베델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