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page
이달의 순국선열 • 김마리아 선생 67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였다. 근화회는 “조 국 광복의 대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재미 한 인사회의 일반 운동을 적극 후원”할 목적으 로 조직되었는데, 그는 근화회 회장으로서 회 원들과 함께 적극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0 년에는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Biblical Seminary)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1932년 7월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 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서울에서 활 동하지 못하고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하였다. 신학 교에서도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 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 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문 후 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평양기독병원에 입원 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 다. 「화제의 김마리아양」(1932.7.29, 동아일보). 동아일 보는 3회에 걸쳐 「화제의 김마리아양」이라는 제목으 로 13년 전 최초의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과 관련자들을 소개하고, 김마리아 의 미국생활과 귀국 이후의 계획 등을 보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