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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양기탁 선생 67 다. 1930년에는 남경(南京)으 로 가서 관내 한국독립운동단 체들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32년 10월 김규식 등 다수 의 동지들과 함께 ‘한국대일 전선통일연맹’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다 1934년 1월 중국 진강(鎭 江)에서 실시한 임시정부 의 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선 임되고, 제10회 국무회의에서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임 시정부의 활성화와 민족 대동단결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임시정부 국무령으로서 가장 긴급한 일이 독립운동 관련 정당이나 단체를 통합하여 단일 대당(大黨)을 결성하는 것이라 고 판단, 1934년 3월 남경에서 ‘한국대일전 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회의를 열었다. 그리 고 1935년 7월 마침내 한국독립당, 대한독립 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등 5당 을 통합한 민족단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5당 합당 이후 민족혁명당의 분열이 발생 하자, 1937년 8월 지청천·최동오·유동열 등 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새로 구성하여 위원장 에 추대되었다. 중일전쟁(1937.7.7) 발발로 대일결전이 임박하자 1937년 8월 남경에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등 3당 과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동지회, 국민회 등 6개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 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오랜 망명생활과 5당 합당 추진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중국 강소성(江蘇省) 율양 (栗陽) 길당암(吉堂庵)에서 건강을 회복하려 고 요양하였다. 그러나 1938년 4월 19일 68 세를 일기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정부는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15년 5월 양기탁의 수형 당시 모습(구 서대문형무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