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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 • 마가렛 센더먼 데이비스 · 이사벨라 멘지스 · 데이지 호킹 선생 67 국어 교사와 함께 비기독교 가정의 어린이들을 돌보 았고, 시골 사경회(寫經會)에 참여했다. 다시 부산으 로 돌아와 3년 동안 전도부인들의 도움을 받아 여성 을 교육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을 책임졌다. 또한 어 린이 성경학교와 타종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주일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3월 3 · 1운동 무렵에는 부산진 일신여학 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일신여학교 한국인 교사 박시연 등이 고등부 학생들 과 함께 부산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11일 저녁 시위에 나서자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교장 마가렛 데이비스와 함께 시위학생들을 설득하여 기숙사나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들 을 막는 것이 소용이 없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왔는 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시위선동 혐의로 교장 데이 비스와 함께 검속되었다. 3월 14일 대조 심문을 위해 부산지방법원 법정에 다시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3월 15일에도 부산진파 출소에 불려가 관리들과 헌병들에게 둘러싸여 3월 11일 사건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일제는 데이비스와 함께 그녀를 여학생들이 벌인 만세운동의 지휘자로 간주했다. 결국 영국 영사관의 개입으로 다시는 이 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일제측 자료에 따르면 “데이지 호킹과 교장 마가 렛 데이비스는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당시 데이지 호킹은 학생들에게 시위를 권유하며 함 께 행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 배를 결의한 후부터는 경남지역의 신사참배거부운 동을 후원했는데, 1940년 3월 한상동 목사가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거부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운동방침 을 협의했다. 1941년 영 · 일 관계 악화와 영국영사관 의 권고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호주로 귀국했다. 귀국 후 호주의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에 종사하 다가 1971년 6월 10일 별세하였다. 일신여학교 3 · 1운동의 의의 1919년 3월 11일 저녁 9시경 일신여학교의 교사 와 학생들이 주동이 된 만세시위는 경남지역 3 · 1운 동의 효시였다. 뒤이어 12일에는 마산, 13일에는 동 래·창녕·밀양, 14일에는 통영·의령, 18일에는 하동· 합천·진주, 19일에는 함안, 20일에는 거창·산청, 21 일에는 사천, 24일에는 창원, 27일에는 양산, 28일 에는 함양, 30일에는 고성, 31일에는 김해에서 독립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신여학교의 3 · 1운동은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대표적인 3 · 1운동에 해당했다. 사실 이 운동을 주동 했던 교사 박시연 등도 여학교를 갓 졸업하고 교사 가 되었기 때문에 교사로서보다는 선배로서의 영향 력이 더 컸을 것이다. 특히 시위의 계획과 지휘를 비 롯한 전반을 여교사와 여학생들이 주도했다는 점에 서 여성 독립운동 분야에서 지니는 의미가 크다. 일신여학교의 3 · 1운동에서 교장과 교사였던 선교 사들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우려하면서도 태극기 제작 준비를 도와주었고, 시위 당시 학생들을 보호 했다. 이에 당시 일제 당국은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 이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