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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최용신(崔容信) 선생 67 초기의 냉소와 비난을 극복하고 주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 다 지역 주민들의 냉소와 비관주의와 맞서야 만 했다. 신간회(新幹會) 수원지회장을 역임하 고 그를 후원했던 염석주(廉錫柱)조차도 그를 처음 봤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떤 날 얼굴이 얽은 신여성 하나가 부인 몇 사람과 같이 찾아와서 자기는 지금 샘골에 있으면서 이 지방을 위하여 작은 힘이나 바 쳐보고자 하니 부디 잘 지도 협력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사회의 풍파를 많이 겪어 쓴맛 단맛을 다 맛보아서 무엇을 한다는 사 람들에게 아주 실망한 참인데 더구나 세상을 모르는 젊은 여자 하나쯤에게 무슨 큰 기대 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 날고 기는 놈들도 농 촌에 와서 실적을 못 내는 이 시절에 너 같은 계집애가 무엇을 해보겠다고 그러느냐 하는 경멸을 던졌었어요.” 위생생활, 생활개선 등의 주장에도 주민 들은 “제기! 파리 안 잡아도 파리에 물려죽은 놈은 하나도 없었다네. 책상물림의 젊은 처 녀가 무엇을 안다고 이러니 저러닌가”라는 핀잔을 주기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 응에 굴하지 않고 부임 초기부터 마을에서 운영되던 강습소를 확대,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무허가였던 강습소에 인 가를 신청하였고, 강습생이 110여 명에 달하 자 강습소 증축계획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의 노력과 열정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마을을 보며 냉소와 비관을 거두고 그의 활동 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다. 증축을 위 한 모금활동이 주민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 로 진행되었고, 근처 솔밭의 소유주였던 박용 덕(朴容德)은 인근 토지 1,500평을 기증하였 다. 최용신의 헌신,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자 발적 모금과 호응으로 예배당에 딸린 작은 강 습소가 ‘천곡학원’이라는 정식 교육기관으로 발전한 것이다. 샘골강습소 주춧돌(최용신기념관 앞) 1933년 1월 15일 열린 샘골강습소(천곡학원) 준공식. 앞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최용신(최용신기념관 제공)